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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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러셀은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고자 연구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ref>[http://www.lehman.cuny.edu/deanhum/philosophy/BRSQ/04may/leiber.htm Russell and Wittgenstein: A Study in Civility and Arrogance], article by Justin Leiber</ref>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자주 거침없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천재다운 능력을 이용해 논리학상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매료되었고 영국 철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의해 자신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로만 비추어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다.<ref>고명섭, 담론의 발견, 한길사, 2006년, {{ISBN|89-356-5820-0}}, 37쪽</ref>
 
{{인용문|그 사람은 천재에게서 나타나는 전통전통적 특징을 전형이 될 만하게 현로했다현현했다. 재언하면, 그 사람은 열정 있고 해박했으며, 격렬하고도 좌중을 휘어잡는 인재였다.<ref>''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pg. 329.</ref> <br /> 그 사람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나는 더는 철학의 기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ref>''The Autobiography of Bertrand Russell'', pg. 282.</ref>|러셀의 회고}}
 
이 시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고전음악과 여행이었다. 1912년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여로에 종종 동성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동행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무어가 이끌던 비밀 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