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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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역사}}
[[파일:Galatea Polyphemus MAN Napoli Inv8983.jpg|thumb|250px|[[아시스와 갈라테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폴리페무스]]. [[폼페이 스타일]]로 그려진 [[로마 미술|로마 프레스코]] 벽화(기원후 45-79년)]]
 
'''이탈리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 이탈리아|선사 시대]]인 85만년 전 무렵에 살았던 [[사람족|구석기인]]의 유적인 [[몬테포기올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ref name="nationalgeographic.it">[http://www.nationalgeographic.it/scienza/2012/01/20/news/erano_padani_iprimi_abitanti_ditalia-807204/ National Geographic Italia – Erano padani i primi abitanti d’Italia](이탈리아어)</ref> 또한 4만 3천년 전 무렵부터는 [[크로마뇽인]]이 거주 하였다. 기원전 6000년에서 5500년 사이 이탈리아에서도 [[유럽의 신석기]]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청동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 무렵 [[인도유럽어족]]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시작되었고 철기 시대를 맞이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고전기 이전의 이탈리아는 여러 갈래의 문화로 나뉘어, 북부에는 [[켈트족]]이, 중부에는 [[에트루리아인]]이, 그리고 남부에는 [[마그나 그라이키아|고대 그리스의 식민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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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6년 로마 [[교황]]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침공하여 수도 라벤나를 함락시켰다. 랑고바르드의 왕족과 귀족은 동로마제국으로 망명하여 귀화하였고 왕국은 해체되었다. 피핀은 교황에게 랑고바르드 지역을 [[피핀의 기증|기증]]하였고, 이로서 교황은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실재적 영토를 갖는 군주가 되었다. 800년 [[교황 레오 3세]]는 피핀 3세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카롤루스]]를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추대하였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여전히 동로마제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레오 3세는 여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권위를 갖고자 하였다. 레오 3세의 이러한 행동은 1054년 공식화된 [[동서 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ref>게르하르트 슈타군, 장혜경 역,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종교학》, 웅진지식하우스, 2007년, {{ISBN|978-89-0107-174-9}}, 173쪽</ref> 교황청은 서유럽 내에서 종교에 대한 독점권 권위를 갖고자 하였다. 주교의 임명권을 놓고 왕이나 공작, 백작과 같은 봉건 영주들과 교황청은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1122년 맺어진 [[보름스 협약]]으로 교황만이 주교를 서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 문제는 중세 기간 내내 민감한 쟁점이었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해체한 뒤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랑고바르드 왕국을 대체한 [[이탈리아중세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왕국]]은 형식적으로 조직된 일종의 괴뢰정부였다. 랑고바르드 왕국이 존립하였을 당시 이에 대항하여 독립을 유지하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후로도 독자적인 주권 국가로 유지되었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많은 도시들은 신성로마제국의 간섭에 대항하여 [[롬바르디아 동맹]]을 결성하였다. 1176년 신성로마제국과 롬바르디아 동맹 사이에 벌어진 [[레냐노 전투]]에서 동맹측이 승리함에 따라 롬바르디아 동맹에 속한 각 도시국가들은 신성로마제국에 잔존하되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는 자치를 허용받았다.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아말피 공화국]]과 같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의 도시들이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이후 르네상스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ref>Stark, Rodney, ''The Victory of Reason'', New York, Random House, 2005</ref> 이렇다할 주도적 권력이 없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그에 딸린 주변 읍락을 지배하면서 상공업을 일으켰다.<ref>Skinner, Quentin,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 vol I: ''The Renaissance''; vol II: ''The Age of Reform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69</ref> 귀족들 역시 공화국의 일원으로서 지배 체계에 협력하였고, 공화국의 실권은 평민들이 장악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제국에서 벗어난 독립국의 자유를 누리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학과 공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은행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였다.<ref name="ReferenceA">Ferguson, Niall, ''The Ascent of Money: The Financial History of the World''. Penguin, 2008</ref> 훗날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 공화국]]을 장악하였던 [[메디치 가]] 역시 중세의 신분 질서 속에서는 평민에 불과하였다. 메디치가는 13세기 이후 상업에 뛰어들어 서서히 피렌체 공화국의 지배 가문으로 부상하였다.<ref>라우로 마르티네스, 김기협 역, 《메디치가 살인 사건의 재구성》, 푸른역사, 2008년, {{ISBN|978-89-9151-066-1}},47-92 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