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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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의 전역 ==
다음에 틸리는 서쪽으로 진로를 바꿔 독일을 통해 진군을 하기 시작했으나, [[1622년]] [[4월 27일]] [[밍골스하임 전투]](Battle of Mingolsheim)에서 패한 후 스페인의 장군 [[곤살로 데 코르도바 공작]](Duke Gonzalo de Cordoba; 이탈리아 전쟁 기간 중의 유명한 스페인 장군과는 다른 사람이다.)과 합류하였고, [[5월 6일]] 벌어진 [[빔펜 전투]](Battle of Wimpfen)에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바덴 변경백]](Georg Fredrick, Margrave of Baden-Durlach)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가톨릭군의 포병이 적의 탄약고를 명중시킨 후 폭발이 일어남으로써 적이 혼란에 빠지자 틸리의 승리로 결정되었다. 틸리는 [[7월 20일]] [[회히스트 전투]](Battle of Höchst)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리로 [[백작]](독일어로는 그라프Graf)이 되었다. 두 달 간에 벌어진 3개 전투의 승리로 틸리는 6주간의 공성전 끝에 [[9월 19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회히스트에서 이전에 틸리에게 패한 적이 있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Christian of Brunswick)은 다시 군대를 조직하여 틸리와 [[슈타틀론 전투]](Battle of Stadtlohn)에서 싸웠으나 15,000명의 군대 중 고위급 장교 50명을 포함한 13,000명의 병력을 잃을 정도의 대패를 겪었다. 이로 인해 독일에서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사라졌고 1623년 보헤미아는 완전히 항복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가 1625년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북유럽]]의 맹주가 되고자 [[30년 전쟁]]에 개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제 틸리 백작(Count Tilly)이 된 요한 체르클라에스는 [[1626년]] [[8월 26일]]에서26일에서 27일 사이에 벌어진 [[루터 전투]](Battle of Lutter)전투에서 덴마크 군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틸리의 정예화 된 보병대는 덴마크군의 전열을 향하여 4번이나 돌격을 감행하였고, 결국 적의 전열을 돌파해 결정적 승리를 얻었다. 궤주하는 덴마크 군을 추격해 반 수 이상 격멸하였는데, 궤주하는 적을 이토록 추격한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전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 승리와 기타 발렌슈타인의 승리로 덴마크를 굴복시켜 [[뤼베크 조약]]을 체결해 평화를 얻고자 했지만, 이미 붕괴된 유럽의 세력 균형은, 뛰어난 사령관이자 현명한 왕이며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하고자 [[폴란드]]와 10년의 전쟁을 벌여 자국을 주목받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Gustavus Adolphus) 치하의 스웨덴이 1630년 전쟁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 [[마그데부르크 약탈]](Sack of Magdebu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