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 (193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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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름 = 李玖
|그림 =
|본명 = 이구
|시호 = 회은황태손 <small>(사시)</small>
|작위 = 이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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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국적]] <br> {{국기나라|일본}} [[국적]](前) <br> {{국기나라|미국}} [[시민권]](前)
|종교 = [[천주교]] (세례명: 요한)
|부친아버지 = [[의민태자]]
|모친어머니 = [[이방자]]
|배우자 = [[줄리아 멀록]](前, 1958년~1982년 이혼)<br />아리타 키누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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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유학 ===
[[1953년]], [[맥아더]] 사령부의 배려로 미국으로 유학,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건축과에 입학했다. 그의 모친어머니 이방자는 유일한 아들을 이국으로 보내기를 주저하였으나 아버지 영친왕이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하여 유학길에 힘을 보탠다.
 
장학금을 받고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며 미국 유학생활 중 그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을 만나 알게 된다. 줄리아는 그보다 8년 연상이었다. 고학생에 혼혈인 출신인 이구와 역시 혼혈인으로 같은 불우한 처지의 줄리아 멀록은 바로 가까워졌다. [[1956년]], 이구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를 졸업하였다. 영친왕 내외가 미국 유학중이던 이구를 만나기 위해 여권을 발급하려 하자 거절당하였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이은은 일본 사람이니 일본 여권을 내라고 해"라며 한국 여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 여권으로 미국을 방문한 영친왕 내외는 이구의 졸업식을 무사히 참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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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하에서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왕자라는 지위를 사칭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귀국을 허용하였으나 이구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한국으로의 귀국을 취소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거주하며 사업 등을 하였다.
 
[[1963년]], [[박정희]] 정부의 승인으로 [[한국]]에 돌아와 모친과어머니과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며 [[1965년]]부터 대학가에서 건축설계학을 강의하였으며, 이듬해 트란스아시아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이름이 회자되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과 [[연세대학교]]의 건축공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1970년]] 부친인아버지인 [[의민태자]]가 사망하였고,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1973년]] 친척들과 함께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세웠으나 결국 도산하고 말았다.
 
=== 이혼과 일본 출국 ===
종친들의 종용에 못 이겨 대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그는 [[줄리아 멀록]]과의 결혼생활을 20여 년간 유지했다. 그러나 1977년 별거에 들어가고, [[1979년]] 이구는 홀로 일본으로 떠났다. [[1982년]] 이구는 부인이었던 [[줄리아 멀록]]과 이혼하게 되었는데, 이혼하게 된 원인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머니 이방자는 줄리아가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하며 안타까워했다.<ref> 그러나 이방자 역시 일본계 여성으로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일 수 있었다.</ref> [[줄리아 멀록]]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주변의 거듭된 반대와 비난에 시달렸다. 줄리아는 실내장식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며 시어머니 이방자의 명휘원 사업을 돕고 열심히 시어머니를 부양하였으나, 일부 종친들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다. 줄리아 멀록과의 이혼 이후 그는 일본에서 무당 아리타 키누코(有田絹子, Arita Kinuko, 한국식 이름: 이견자(李絹子))와 재혼하여 함께 살았다.
 
[[1984년]] 이구는 사기 혐의로 피소되었다.<ref>"詐欺 혐의로 李玖씨 日서 被訴", 동아일보 1984년 06월 19일자 7면, 사회면</ref> [[1989년]] 모친마저어머니마저 잃고 여러 번 종약원과 종친들의 귀국 종용이 계속 있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1996년]] 영구 귀국해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명예총재를 맡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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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057976
|출판사=연합뉴스 생활/문화
|날짜=2005년 07월 24일}}</ref> 뒤에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추증한 [[사시 (시호)|사시]](私諡)는 회은(懷慇)이고, 원호(園號)는 [[회인원]](懷仁園)이다. 따라서 회은태손, 회은황태손으로 부르나 [[대한민국]]의 사학계에서는 이구를 황태손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ref> 이구가 태어날 때는 황태손에 봉할 주체인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굳이 그를 기념(紀念)하고 싶다면 행장(行狀)이 맞지 평민(平民)으로 죽은 이에게 아무리 사시(私諡)라도 시호(諡號)가 맞냐는 반론(反論)이 있다. </ref> 다만 [[1945년]] 일제 패망 직후부터 [[1947년]]까지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구를 왕세자라고 보도하기도 했다.<ref>"舊王世子 李玖 外人商店 店員", 경향신문 1950년03월 31일자 2면, 사회면</ref><ref>"今日", 경향신문 1947년 05월 03일자 1면, 사회면</ref>
 
== 의혹과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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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세자 대우 ====
이구는 [[1945년]] 이후에나 부왕 [[영친왕]]의 사후에 직접적으로 한국의 왕위나 황제위를 요구한 적은 없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동안 한국 사회는 그를 왕세자로 대우하였다.<ref> 자유신문 1950년 3월 31일자 기사 </ref> 자유신문 1950년 3월 31일자 기사에는 그를 왕세자로 칭한 바 있다. 그밖에 [[경향신문]]의 3월 31일자 기사 2면에도 "舊王世子李玖 外人商店店員"이라 하여 이구를 왕세자로 보았다.
 
=== 정체성 논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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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계 논란 ===
이구는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 문제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구의 사망 이후 큰아버지 [[의친왕]](義親王)의 손자 [[이원 (황손)|이원]](李源)이 양자로 입적해 황실의 대통을 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민법]]상 사후(死後) 입양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구의 국내 호적에 1969년 입적한 양녀 이은숙(李恩淑, Eugenia Unsuk, [[1959년]] ~ )이 있으며, [[일본]] 호적에는 [[아리타 키누코]]라는 무당과 혼인신고 관계가 되어 있다.<ref> {{뉴스 인용
|제목=김상열 씨가 밝히는 옛 황실 6대 비화
|출판사=일요신문 제7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