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Neobot (토론 | 기여)
잔글 2018-06-22 Sangjinhwa의 요청, replaced: 부친 → 아버지, 모친 → 어머니, |본명 → |휘 using AWB
6번째 줄:
|그림설명 =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셀레우코스 1세의 그리스 조각상의 로마 복제품
|칭호 =
|본명 = 니카토르
|작위 = [[셀레우코스 제국]]의 [[바실레우스]]
|재위 = 기원전 305년–기원전 281년
84번째 줄:
이처럼 안티고노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자 [[기원전 314년]]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와 맞섰다. 하지만 안티고노스는 이에 맞서 영토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잔존해 있던 폴리페르콘 세력과 연합했다. 이에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안티고노스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북진했다. 하지만 [[기원전 312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수복하자 안티고노스는 다시 남하해야 했다. 이쯤 되자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휴전을 바라게 되었고, 결국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노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휴전 협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 협정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모두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졌음을 공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산드로스]]는 이 협정 이후 별 필요가 없어진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마지막 혈육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 모친어머니 [[록사나]]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폴리페르콘]]을 보내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생아이자 그의 마지막 자손이었던 [[헤라클레스]]마저 독살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는 단절되었다. 한편 바빌론을 차지한 셀레우코스는 동쪽으로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안티고노스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기원전 311년]]부터 309년까지 바빌론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휴전 협정으로 잠시 숨을 돌리자 [[디아도코이]]들은 곧바로 딴 생각들을 품었다. [[기원전 308년]] 카산드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화해했고, 이에 그리스 폴리스들이 동요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안티고노스와 은근슬쩍 손을 잡고 에게 해와 펠로폰네소스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별 성과를 얻지는 못했고 안티고노스와의 협력도 곧 무산되었다. [[기원전 307년]]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에 간 사이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를 점령했고, [[기원전 306년]]에는 [[키프로스]]로 쳐들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연속으로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이 때부터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공공연히 왕을 칭하기 시작했고,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도 뒤질세라 왕위를 자처했다.
90번째 줄: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모두 한 방씩 먹인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305년 [[로도스]]를 공격했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결국 로도스를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할 때만 빼면 안티고노스를 지원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돌아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폴리스 동맹을 창설했고, 궁지에 몰린 카산드로스는 휴전 협정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를 대적하기 위해 리시마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가장 가까운 [[트라키아]]에 있던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에 침입하자 그리스의 데메트리오스는 부친아버지 안티고노스를 돕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철수했다. 아나톨리아를 휩쓸고 다니던 [[리시마코스]]의 군대는 [[이프소스]]에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의 군대에 의해 고립되었는데, 때마침 셀레우코스의 군대가 당도하여 양측 사이에 대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이 [[기원전 301년]] 벌어진 〈[[이프소스 전투]]〉로, [[디아도코이 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으며 셀레우코스의 압승으로 끝났다. 당시 80대 노인이던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만 패잔병을 이끌고 겨우 그리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셀레우코스의 역습’이 가능했던 것은 서방에서 [[디아도코이]]들끼리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셀레우코스는 큰 방해를 받지 않고 땅따먹기 하듯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동방 영토를 차례차례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저지할 만한 유일한 세력은 한창 인도 전역을 석권하고 있던 [[찬드라굽타]]의 [[마우리아 왕조]]였는데,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가 차지한 동방 영토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뒤 휴전을 했고, [[기원전 303년]] 동맹을 맺었다. 이 결과 셀레우코스는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 [[드란기아나]] 및 그 외의 모든 인도 접경 영토를 포기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코끼리 500마리를 받았다. 이로써 다소 굴욕적이긴 하나 큰 손해 없이 안정된 동방 영토를 차지한 셀레우코스는 기본적인 수적 우위에 더해 페르시아 기병과 인도 코끼리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전력으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