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업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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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권업회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러일전쟁에 패한 러시아 정부는 권업회가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음을 간파하고, 한인들의 정치·사회활동을 탄압하였고탄압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러시아 주재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영사관에서는 러시아 당국에 권업회와 권업신문 등의 폐지와 이종호, 이동녕(李東寧), 김하구, 오주혁(吳周赫), 이갑, 안공근(安恭根) 등 블라디보스토크, 연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하는 한인 운동자들의 추방을 요청하였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동맹국이 된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1914년]] [[8월 7일]] 권업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기관지인『권업신문(勸業新聞)』도 정간되었다. 그러나 권업회의 전통은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의 창설로 이어졌다.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이러한 활동을 통한 유대와 항일독립투쟁 의지는 [[1919년]] [[대한국민의회]] 성립의 토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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