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장려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60 바이트 제거됨 ,  3년 전
잔글
중립적 표현보다는 출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출처필요문단 틀로 대체
편집 요약 없음
잔글 (중립적 표현보다는 출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출처필요문단 틀로 대체)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자, [[경성부|경성]]의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해 [[1922년]] 말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ref name="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23년]] [[1월 9일]] [[경성부|경성]]의 [[서북협성학교]]에서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모여 발기준비대회를 열었고, 이어서 [[2월 16일]]에 3000여 명의 민족단체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물산장려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ref name="두산백과">[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4650 물산장려운동] 《두산백과》</ref> 물산장려운동의 구호는 ‘조선사람 조선으로!’, ‘우리 것으로만 살자!’였다.{{출처|날짜=2018-06-25}} 취지서에 밝힌 실행 조건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
 
== 한계와 비판 ==
{{출처 필요 문단|날짜=2018-06-25}}
그러나 물산 장려 운동은 운동 자체에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토산품만 사용하다 보니 토산품 가격이 크게 폭등하였고,{{출처}} {{중립 필요 문장|날짜=2018-06-25|이는 곧 상인과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주는 결과만 낳게 되어버린다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들과 {{중립 필요 문장|날짜=2018-06-25|지각있는일부 민중들이}} '물산 장려 운동은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다. 여기에 일본 제국 총독부 당국의 극심한 탄압과 [[박영효]], [[유성준 (1860년)|유성준]] 같은 친일 세력들의 관여로 일제와 타협하게 되는 등 변질이 되어 감에 따라 결국 쇠퇴했다.{{출처}}
 
== 각주 ==
<references/>
 
== 같이 보기 ==
* [[일제 강점기]]
* [[조만식]]
 
== 각주 ==
{{각주}}
 
[[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