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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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
오자서의 부친 오사는 초 평왕의 태자 스승으로, 평왕과 태자의 사이가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강대국으로 만든 뒤, 기원전 506년에 [[초 (전국)|초나라]]에 병사를 일으켜, 그 수도를 함락시켰다. 평왕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오자서는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사기 (역사서)|사기]] 오자서열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는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를 역행할 수밖에 없다.({{lang|zh|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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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사후 1000년 뒤인 [[당나라]] 때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오자서는 격정의 사람이다. 그 몇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격정 백탕네에 다대한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 격정이기 때문에 최후는 주군과 대립해 소외당하고 자살에 몰렸다. 한편, [[범려]]는 냉정하게 시류를 읽는이나 월을 떠나, 최후는 제로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ref>오의 수도에서 만난 고소는 현재의 [[쑤저우 시]]이며, 오자서에 연관된 지명이 많다. 또, [[2006년]]에는 오자서의 무덤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쑤저우 시 [[:zh:胥口镇 (苏州市)|서구진(zh)]]에 현지 기업도 협찬해 서왕묘가 건설되고 있는 등, 현지에서의 인기는 지금도 뿌리 깊다.</ref>▼
▲오자서는 격정의 사람이다. 그 몇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격정 백탕네에 다대한 공적을 올렸다. 그러나 그 격정이기 때문에 최후는 주군과 대립해 소외당하고 자살에 몰렸다. 한편, [[범려]]는 냉정하게 시류를 읽는이나 월을 떠나, 최후는 제로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ref>오의 수도에서 만난 고소는 현재의 [[쑤저우 시]]이며, 오자서에 연관된 지명이 많다. 또, [[2006년]]에는 오자서의 무덤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쑤저우 시 [[:zh:胥口镇 (苏州市)|서구진(zh)]]에 현지 기업도 협찬해 서왕묘가 건설되고 있는 등, 현지에서의 인기는 지금도 뿌리 깊다.</ref>
[[조조]]는 [[관도 대전]]의 때에 자군에게 내려온 [[장합]]등을 마중나갈 때에 오자서의 최후를 인용해, 「오자서는 시중드는 군주를 오인한 일을 깨닫는 것이 늦었다. 너가 나에게 항복한 것은 [[미자계]]가 [[은나라]]를 배반해 [[주]]를 시중들어 [[한신]]이 [[항적|항우]]의 아래를 떠나 [[유방]]을 시중든 것과 같은 정당한 행동이다」라고 해 편장군으로 임명해, 도정후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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