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스 의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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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Лютер в Вормсе.jpg|thumb|right|upright=1.5|안톤 폰 베르너 작 보름스
[[파일:Luther statue, Martin-Luther-Denkmal, Worms.JPG|thumb|right|upright=1.5|보름스에 있는 루터상]]
'''보름스
==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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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참석 ==
[[카를 5세]]는 루터의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였지만 이미 [[얀 후스]]나 [[윌리엄 틴데일]] 등 [[종교 개혁가]]들이 붙잡힌 즉시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화형을 당한 전례가 있어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불참을 권유했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비서 스팔라틴(Spalatin)을 보내어 1415년
하지만 루터는 살기 위해 비굴하게 숨는 것보다 죽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며 참석을 강행하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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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의 답변 ==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인용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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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4월 18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인용문2|[[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
루터가 보름스 의회를 떠날 때, 약속대로 독일군이 그를 호위하여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많은 백성들이 찬양하였지만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살해 음모를 파악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프리드리히]]는 4월 24일 병사들을 보내 루터를 은밀하게 아이제나흐 근처의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카를 5세는 루터의 단호한 입장에 충격을 받았다. 가톨릭 교도였던 황제는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5월 26일 '보름스 칙서'를 발표하면서 루터를 정죄하고, 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체제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아니었으므로 루터를 체포 할 수는 없었다.<ref>오덕교《종교개혁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P88~9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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