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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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원년 14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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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태조 3년(1394년) 청보현(靑寶縣)이 됨.
* [[조선]] 세종 즉위년(1418년) 이조판서가 상소하기를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친정 내향(고향)인 청보현을 군으로 승격시킴이 마땅하다 하여 그해 9월 26일 조정에서 결정되기를 진보현과 청보현(靑寶縣)을 합쳐서 청보군(靑寶郡)으로 승격. 당시 조선의 행정체계로 군수郡事(郡守)는 종 4품의 외관직이나 극히 이례적으로 정3품의 당상관인 통정대부 지청보군사(通政大夫 知靑寶郡事)를 배치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초대 지청보군사에 유공(柳恭)이 임명되었으며 동헌도 청부고을로 옮겨졌다.<ref>{{뉴스 인용|url=http://young317.com.ne.kr/ancestor/shim01.html|제목=관향(貫鄕) 청송(靑松)의 연혁(沿革)|확인 날짜=2012-08-19}}</ref>
* [[조선]] 1424년(세종5년세종 6년) 10월 27일에 조정에서 다시 결정하기를 청보군의 동헌이 군의 중심지에 있지 못하고 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전 진보현 백성들의 동헌왕래에 불편하고 행정상에도 불편한 점이 많아 결국 진보현을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한편 송생현(松生縣)을 합쳐서 고을 명칭을 현재의 명칭인 청송군(靑松郡)이라 개칭하였는데 이는 청부의청보의 <靑>자를 따고 송생의 <松>자를 따서 청송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 [[조선]] 세조5년세조 5년(1459년) 청송군(靑松郡)을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삼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바 땅이 척박하고 옛 청부(靑鳧縣)의 인구가 2백 17명이며, 옛 송생(松生縣) 인구가 3백 43명이요, 모두 합쳐 인구가 1000 명도 되지 않는 청송군을 경상도에서도 김해도호부, 대구도호부를 비롯해 7곳에 불과한 도호부로 승격시키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일이나 세조가 수양대군시절부터 모후에 대한 효심이 컷으며 대숙청으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도호부 승격이 이뤄졌으며 1895년 갑오개혁 때 군으로 다시 환원되기 전까지 437년 동안 도호부가 유지되었다.<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B2%AD%EC%86%A1&keyword=%EC%B2%AD%EC%86%A1l세조 16권,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6월 14일(갑자) 2번째기사 ] 조선왕조실록</ref> *조선왕조 500년동안 거듭된 왕명(세종, 세조)으로 속현 (屬縣)에서 도호부로 승향(陞鄕)된 유일한 사례이다.<ref>[http://www.cs.go.kr/cheongsong/00003085/00003119.web 437여년을 이어온 청송도호부] </ref>
* [[1895년]] 음력 윤5월 1일 안동부 청송군으로 개편하였다.<ref>[[:s:고종실록 32년 5월#음력 5월 26일|칙령 제98호 地方制度改正件]] (1895년 음력 5월 26일)</ref>
* [[1896년]] [[8월 4일]] 경상북도 청송군으로 개편하였다.<ref>칙령 제36호 地方制度官制改正件 (1896년 8월 4일)</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