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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원제|원제]] 때 [[승상]] [[위현성]]이 유태공의 종묘를 폐지하려 하였는데, 평당은 이에 반대하였고, 원제는 평당의 말을 따랐다.
 
이후 사자가 되어 유민들을 [[유주]]로 이주시켰을 때, [[자사 (관직)|자사]]와 [[태수]]들 중 근면한 자를 찾아내어 보고하였고 또 [[발해군|발해]]의 염지(鹽池)를 개방하여 백성을 구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파견된 열한 명의 사자들 중 가장 높은 실적을 쌓아, [[승상사직]]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법에 걸려 [[삭방]]자사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장신소부[[장신궁|장신]][[소부 (長信少府관직) |소부]]· 대홍려 · [[광록훈]]으로 승진하였다.
 
[[순우장]]이 창릉(昌陵; [[전한 성제|성제]]의 능묘) 조성을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 평당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조성을 멈추는 쪽으로 결정되었고, 순우장은 공적을 인정받아 열후에[[열후]]에 봉해졌다. 평당은 다시 순우장이 비록 좋은 진언을 하였으나 열후가 되기에는 알맞지 않다고 하였고, 결국 노여움을 사 [[거록군|거록]]태수로 좌천되었다. 이후 [[황하|하수]](河水)의 치수를 담당하여, 하수의 제방 관련 업무를 맡았다.
 
[[전한 애제|애제]] 즉위 후, 중앙으로 들어와 [[광록대부(光祿大夫) ]]· 제리(諸吏) · 산기(散騎)가 되었다. 이후 다시 [[광록훈]]이광록훈이 되었고, [[사공 (관직)|어사대부]] · [[승상]]에까지 이르렀다. 본래 승상은 열후에 봉해지는 것이 관례였는데, 평당이 취임했을 당시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일단 [[관내후]]에 봉하고, 봄이 되는 대로 열후에 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취임 이듬해 초에 평당은 큰병에 걸렸고, 책봉을 위한 사자가 왔을 때 응하지도응대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평당은 사직을 청원하였고, 애제는 이를 만류하였으나 한 달 만에달만에 죽고 말았다. 전한의 승상들 중 열후에 봉해지지 못하고 죽은 자는 평당이 유일하다.
 
아들 [[평안]] 또한 경서에 밝아 출세하였고, [[전한 평제|평제]] 때 [[승상|대사도]]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