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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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빈 안씨'''(昌嬪 安氏, [[1499년]] [[9월 2일]]([[음력 7월 27일]]) ~ [[1549년]])는 [[조선]] [[조선 중종|중종]]의 후궁이다. [[덕흥대원군]]의 생모이자 [[조선 선조|선조]]의 할머니이다. 본관은 [[안산 안씨|안산]](安山)이다.
 
생전에는 숙용까지 올라가 숙용안씨(淑容安氏), 안빈(安嬪)으로 불렸으며, 선조 초기까지도 안빈이라 불렸다. 선조 때 창빈으로 개봉되었는데, 개봉된 시점은 정확하지 않다. 시호는 미상이다.
 
== 생애 ==
[[1499년]] [[9월 2일]]([[음력 7월 27일]]) [[시흥군|금천]]에서 [[안탄대]]의 딸로 태어나, 1507년에1507년(중종 2)에 [[내명부]] 궁인으로 들어갔다. [[1520년]] 내명부 5품 [[상궁]]이 되었다.
 
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행동이 정숙하고 참신하여<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6~117, {{ISBN|9788950918941}}</ref> [[정현왕후|대비 윤씨]]의 눈에 들어 대비의 후원으로 스무 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ref name="lhw"/> [[1540년]](중종 35) [[숙용]](淑容)까지 그 지위가 올랐다. [[1527년]](중종 21)을 전후하여 안빈으로 봉작되었는데, 그의 집 노비들이 이어소에 수시로 출입한다 하여 [[사간원]]으로부터 수시로 탄핵을 당했다. [[1530년]] [[8월 10일]]의 왕조실록 기록에도 안빈으로 나타난다. 중종 말년에 빈으로 봉해졌는데, [[1545년]](인종 2) [[1월 24일]]에 지은 중종의 행장에는 숙용 안씨로 되어 있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빈에서 다시 숙용으로 강등되었는지 이유는 실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다.
 
[[영양군 (왕족)|영양군]]을 1521년에 생산하였고, [[정신옹주 (중종)|정신옹주]]를 1526년에 낳았으며, 1529년에 숙원에 봉해지고 [[덕흥대원군|덕흥군]]을 1530년에 낳았다. 품행이 단정하여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와의 사이도 돈독했고, 중종 사후에도 문정왕후의 만류로 인하여 관례대로 승려가 되지 않고 궐 안에 머물렀다. <ref name="lhw"/> [[1545년]] [[11월]] 중이 되어 인수궁(仁壽宮)에 물러나 있고자 했으나 [[문정왕후]]가 허락하지 않나 궁에 머물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그가 안빈에서 숙용으로 강등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안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비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다.<ref>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8, {{ISBN|9788950918941}}</ref>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그녀의 후손들이다.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그녀의 후손들이다.
 
== 사후 ==
[[1549년]] [[11월 7일]]([[음력 10월 18일]])에 죽어 이듬해 3[[월]] [[양주]] [[장흥]]에 묻혔으나 덕흥대원군이 풍수가들의 말을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하였으며,<ref>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9, {{ISBN|9788950918941}}</ref>,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동작리(현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44-7번지) 그녀의 묘는 동작릉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후에 정1품 [[빈]]으로 봉하여다시 복작하여 안빈이라 부르다가 손자인 선조가 [[1577년]](선조 10) 그녀를 창빈이란 [[칭호]]로 개봉하고 하원군의 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모시게 했다.
 
선조는 자신이 서얼 출신이라는 것에 큰 콤플렉스를 가졌다. [[1878년]](선조 11) [[5월 11일]]에는 덕흥대원군 사당의 이름을 정하는 것을 놓고 토의하던 중, 경연관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칭했다가 선조는 크게 분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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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허봉]]이 창빈 안씨를 첩이라고 대놓고 지적하자(安嬪是妾母) 불같이 화를 냈는데, 좌의정 [[홍섬]]이 겨우 변호하여 선조의 진노를 가라앉힌 일도 있다. 시호는 미상이다.
 
[[1681년]](숙종 7) [[3월 17일]] 묘비석이 없어서 1683년(숙종 9) [[12월]] 이조판서 신정이 신도비문을 짓고, 판돈녕부사 이정영이 해서로 쓴 뒤, 비석의 제목은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항이 써서 묘소 근처에 세웠다. 신도비는 1982년 11월 13일 묘소와 함께 서울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