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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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김일성]]과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72100289104003&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7-21&officeId=00028&pageNo=4&printNo=1959&publishType=00010 |제목 =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출판사 =한겨레신문 |날짜 = 1994-7-21 |쪽 = 5 |인용문 = <!-- ◇ 대남공격 제의 △ 49.8.12=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한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한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음을 보고.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 그들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한은 아직도 남한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함. -->}}</ref> 1949년 9월경 박헌영은 [[평양시]]에서 윤레나와 재혼했다. 이때 본부인 [[주세죽]]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박 비비안나]]가 일시적으로 [[북조선]]에 체류중인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윤레나에게서 딸 나타샤와 아들 세르게이가 태어났다. 박헌영은 1949년 재혼 이후 [[주세죽]]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ref name="dong1946"/> 9월 30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그해 10월 4일 박헌영 외무상 명의의 전문을 중국측에 보내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사를 교환하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view.html?cateid=1068&newsid=20060126174516468&p=yonhap</ref> 1950년 5월 박헌영은 [[김일성]] 등과 함께 [[중국]]의 [[베이징]]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파일:스티코프, 김일성, 윤레나, 박헌영, 허정숙.jpg|섬네일|오른쪽|200픽셀|[[1949년]] [[윤레나]]와 재혼 (좌로부터 [[스티코프]], [[김일성]], [[윤레나]], 박헌영, [[허정숙]]]].<br>
[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88675266 박헌영 선생 결혼 기념(앨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6.25 당시 노획 문서]]
 
[[1950년]] [[한국 전쟁]] 직전 그는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면 남한 내에 있는 [[남로당]]원 20만 명이 이에 호응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ref name="이종석250">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역사비평사, 2006) 250페이지</ref> 한편,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였다는 설도 있다. [[1950년]] [[6월 26일]] 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한국 전쟁]] 중에도 인민군 중장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 뒤 전쟁의 운용을 놓고 [[김일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전쟁에서 후퇴할 때 '산으로 들어가 유격작전을 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철수론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ref name="이종석250"/> 한편, 남한에 남아있던 [[남로당]]계와의 연결이 차단되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몰락을 의미했다.<ref name="이종석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