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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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덴마크|해군}} 135,000명 (1625)<ref>[[덴마크의 30년 전쟁 개입]]</ref><br>
{{국기그림|네덜란드|1630}} 77,000명 (1629)<ref>page 54
http://www.pikeandshotsociety.org/documents/article4.pdf {{웨이백|url=http://www.pikeandshotsociety.org/documents/article4.pdf |date=20150924073231 }}
"When the dutch army was increased to 77.000 in 1629 during the threatened Spanish invasion..."</ref><br>
{{국기그림|트란실바니아|1570}} 6,000명<ref>[[베틀렌 가보르]]의 군대가 5,000명의 헝가리군과 1,000명의 독일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반합스부르크 헝가리인들은 3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László Markó:'' The Great Honors of the Hungarian State (A Magyar Állam Főméltóságai), Magyar Könyvklub 2000. {{ISBN|963-547-085-1}}</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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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efenestration-prague-1618.jpg|thumb|30년 전쟁의 촉매제가 된 프라하 사건.]]
 
[[마티아스]] 황제가 아들 없이 그의 생애 동안 그의 왕조를 가짐으로써 그의 정연한 변화를 확실시 하려고 했다. 그는 열렬한 가톨릭 지지자인 [[이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왕좌로 선출하려고 했다.<ref>{{웹 인용|url=http://steveedney.wordpress.com/2006/05/23/the-defenestration-of-prague/|title=The Defenestration of Prague|website=Criticality|author=Steve Edney|date=23 May 2006|accessdate=25 May 2008}}</ref> 몇몇 보헤미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루돌프 2세 (신성 로마 제국)|루돌프 2세]] 때 루돌프 칙령 (또는 [[폐하의 서신]])이라 불리는 종교 칙서로 당연히 인정받은 종교 권리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개신교 제후동맹]]을 설립한 [[프리드리히 4세]]와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5세 (팔츠)|프리드리히 5세]]를 지지했다. 그는 팔츠 선제후이기도 했다.<ref name="tripod">{{웹 인용|url=http://thirtyyearswar.tripod.com/revolt.html|title=Bohemian Revolt|website=thirtyyearswar.tripod.com|accessdate=25 May 2008}}</ref> 그러나 다른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이 주도하는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visualstatistics.net/east-west/War%20West/War%20West.htm#Thirty |title=Wars of the Western Civilization|publisher=visualstatistics.net|accessdate=24 May 200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1204145814/http://www.visualstatistics.net/East-West/War%20West/War%20West.htm#Thirty|보존날짜=2008년 12월 04일|깨진링크=예}}</ref> 1617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선출되었고 마티아스가 죽자 자연스레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왕의 선출 이후 2명의 가톨릭 의원들이 1618년 5월 프라하 성의 대표로 보내졌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결석 동안 정부의 행정을 담당하기를 원했다. 1618년 5월 23일 개신교 의회는 그들을 포위하고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들은 추락했으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라 알려진 이 사건으로 보헤미아 반란이 시작되었다. 곧 보헤미아 분쟁은 [[보헤미아 왕국]], [[실레시아]], [[루사티아]]까지 번졌다. 모라비아는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싸움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모라비아 지역의 분쟁은 다시 [[프랑스 왕국]], [[스웨덴 제국]], [[네덜란드]],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제국]], [[포르투갈 왕국]], [[잉글랜드 왕국]] 등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이 사태에 개입하거나 아니면 예의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ref name="trip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