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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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흥다오'''({{vie|v=Trần Hưng Đạo|hn=陳興道 진흥도}}, [[1228년]] ~ [[1300년]])는 [[베트남]]의 [[쩐 왕조]]의 왕족이자 [[장군]]이다.
== 생애 ==
베트남 쩐 왕조의 초대 황제 [[쩐 왕조 태종|태종]]
처음에는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있던 [[
[[1257년]] [[운남성]]에서 인근의 민족들을 토벌하던 몽골의 장군 우리양카다이(Uriyangkhadai, 兀良合台)가
이에 우리양카다이는 군사를 이끌고 홍 강(紅江)과 로 강(Lo 江)을 따라 현 [[하노이]]인 탕롱(Thăng Long, 昇龍)성에 입성하였으나, 식량 부족과 기후 문제로 군사들의 사기가 위축되고 베트남을 정복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곧 철수를 시작했다. 이에 베트남 측도 이듬해 12월
[[1283년]] [[원나라
하지만 쿠빌라이 칸은 [[1285년]]에 다시 아들 토곤(Toghon 脫驩)을 시켜 50만 대군을 이끌게 하여 다시 베트남을 침공했고, 위급함을 느낀 인종은 쩐흥다오를 국공(國公)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덕망있는 촌로들을 모아 항복을 할 것이냐, 항전을 택할 것이냐를 물었다. [연홍회의(延洪會議)]
{{인용문|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분명히 말해둔다. 마땅히 장작더미 밑에 불을 놓아둔 위기라고 여겨야 하고, 뜨거운 국물에 데어본 사람이 찬 나물도 불면서 먹듯이 경계해야 한다. 사졸들을 훈련시키고 활쏘기를 연습시켜서 모두가 봉몽(逢蒙: 중국 신화에 나오는 명사수)이나 후예(后羿: 봉몽의 스승)같은 명사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필렬(必烈 : 쿠빌라이)의 머리를 대궐 아래 매달고, 운남왕(雲南王 : 쿠빌라이의 아들인 토곤)의 살점을 고가(藁街 : 한나라의 수도 장안의 남문에 있던 거리, 죄인의 목을 베어 효수하는 곳이었다.)에서 썩게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채읍(식읍)이 길이 전해질 뿐 아니라 너희들의 봉록 또한 종신토록 주어질 것이다. 나의 권속(眷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얻게될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처자식 또한 평생을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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