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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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1946년 1월 1일에 만났을 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월 3일 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ref name="cg0125">[http://archive.history.go.kr/id/AUS179_01_05C0081_009 Radio TFGBI #157, Telegram from CG USAFIK to CINCAFPAC] 25 Jan. 1946<br>[[:File:1946-01-25-좌익의 반탁에서 찬탁 돌변.jpg]]</ref>. 1월 2일 공산당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는데, 책임비서 박헌영이 주도했을 것이므로 신탁통치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1월 2일에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ref name="chan0102">[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11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조공, 3상회담 결의에 지지 표명] 중앙신문 1946년 01월 03일<br>[http://www.nl.go.kr/nl/search/bookdetail/online.jsp?contents_id=CNTS-00065282803 反託보다 먼저 戰線 統一, 朝鮮共産黨中央委員會 態度 表明.] 중앙신문, 1946.01.03</ref><ref name="da0105">[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105002092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1-05&officeId=00020&pageNo=1&printNo=6855&publishType=00020 託治(탁치)는 國際協力(국제협력) 朝共(조공)의 態度表明(태도표명) : 1월 2일] 동아일보 1946-01-05 1면</ref>
 
지난 연말까지도 반탁을 강력히 표명하던 여러 좌파단체들도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일제히 바뀌었는데<ref>[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2_0080 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6년 01월 02일 > 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조선일보 1946년 01월 04일</ref>, 여기에는미군정도 이러한 일에는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이다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ref name="cg0125"/>. 1월 3일에 예고되었던 좌익들의 반탁집회는 집회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집회로 돌변하여 진행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ref>[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03 “신탁통치는 오보·왜곡 보도” 외치는 전교조] 미래한국 2016.01.06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