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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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결합은 수많은 예술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상당부분 과장 미화된 점이 없지 않다. 현실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옛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필요했고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입지 강화와 파르티아에 대한 원정에 필요한 자금과 보급품의 지원에 이집트가 필요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대]]를 회복하고, [[헤로데 대왕|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곧 [[괴뢰 정권|괴뢰정권]]으로 세우고, 이어 다음해 시리아와 파르티아로 진군해 들어갔으나 대패하고 물러났다.
 
이무렵 로마에서는 레피두스는 실패한 정치로 실각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공화주의|공화파]] 귀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을 강화하고, 안토니우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데 "정숙한 로마인 부인을 버리고 난잡한 이집트의 여왕과 놀아나 로마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실추시켰다"라고 안토니우스를 비난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소되어 몇 차례 로마로 소환당했으나,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
 
[[기원전 35년]] 안토니우스는 다시한번 이집트의 지원으로 [[아르메니아]] 공략에 성공했다. 원정에서 돌아와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것은로마인들에게는 전통적인 로마 개선식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져 로마인의 반감을 샀다. 개선식 직후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중왕'으로 선포하고 그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2명의 아들과 1명의 딸에게도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파르티아는 단 한번도 로마에 정복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의 왕', '시리아와 리비아의 왕'등 거창한 제왕의 칭호를 붙였다. 특히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이라고 여겨지던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은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공표되었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발표는 옥타비아누스는 물론 로마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후 2년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선전전을 벌였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양자임을 위조하고 적법한 후계자가 아님에도 권력을 찬탈한 자라고 주장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불법으로 속주를 차지하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외국과의 전쟁에 들어갔으며, 영토를 이집트의 자기 자식들에게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제 두 진영사이의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해임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안토니우스편인했다. 그해의 집정관 2명과 원로원 의원의 3분의 1이 그리스에 있는 안토니우스 진영으로 넘어갔다.
 
[[기원전 31년]] 드디어 내전이 시작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에페수스]], [[아테네]], [[파트라스]]에 잇달아 전선을 구축하고 암브라키아 만에서 주력함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장군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이탈리아에서 [[이오니아 해]]를 건너는 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안토니우스의 주요 방어지점을 차례로 점령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점차 분열되었고, 드디어 [[9월 2일]] 벌어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은 괴멸당하고괴멸당하였다. 두사람은 남은 배를 끌고 이집트로 도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유일한 권력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기원전 30년]] 8월 아그리파의 부대가 이집트에 상륙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고 믿고 패배의 절망속에서 자살했고[[자살]]했고, 며칠후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끊었으며, 카이사리온은 살해 되었다.
 
==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