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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양위에는 [[이토 히로부미]], [[송병준]] 등의 개입이 있었음에도 처음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제 대리청정 논의와 고종 양위 주장을 처음 꺼낸 [[이완용]]에게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20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ref name="yun260">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0페이지</ref>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ref name="yun260"/>
 
특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신주까지[[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양자]]를 잘못 들인 탓으로 우봉 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수난한 것이다. 이완용 자신이 "조상 신주가 불타버린 것이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ref name="yun260"/> 을사조약 전까지만 해도 민중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것은 주무 대신이었던 박제순이었다[[박제순]]이었다. 이완용은 박제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격과 비난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완전히 매국노의[[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민중들의 저주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ref name="yun260"/>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군중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이완용은 [[덕수궁]]에서 총리대신으로서 그리고 궁내부대신 임시 서리로서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ref name="yun260"/> [[이완용]]이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식을 주관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이완용 화형식은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식이 끝난 뒤에 덕수궁으로 몰려와 "이완용을 죽여라!"라고 외치는 함성을 듣고 그는 당황한다.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그가 고종 양위를 주관하고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식을 주관했으며, 고종이 그의 음모에 의해 퇴위당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음을 알려왔다.
통감 관저에는 이미 이완용의 가족들이 일본 순사들에 의해 구출되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어진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은 이토의 주선으로 이날부터 왜성구락부에 머물기 시작했다.<ref name="yun261"/> 이완용의 부인 조씨는 왜성구락부에서 거처하기 시작한 첫 1주일 동안은 생활비도 모두 이토가 대주었다고 회고했다. 이완용은 이곳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 9월에 식구들을 데리고 장교에 있는 그의 서형 [[이윤용]]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ref name="yun261"/>
 
[[1908년]] [[1월]] 태황제로 물러난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이완용의 딱한 소식을 듣고 집을 마련한다.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혀 사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딱한 사정<ref name="yun261"/>'을 듣고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ref name="yun261"/><ref>이완용은 이때 자신의 집을 처음 마련한 것이었다.</ref> 고종은 자신에게 양위를 사실상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에게 황실 소유의 저택까지 하사한 것이다. 일반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계속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ref name="yun261"/> 이완용을 고종 퇴위의 책임자로 생각하는 국민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지식인들은 당황해하였다.
 
==== 박영효 탄핵 ====
{{참고|이재명 의거}}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퇴위하고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즉위하자 이완용은 사회적으로 황제를 퇴위시킨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당했고 반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1907년]] [[12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이완용은 [[1909년]]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국왕추도식에 참가하러 [[명동성당]]에 갔을 때, 군밤장수 차림을 하고 기다리던 [[이재명 (독립운동가)|이재명]]<ref>이재명은 당시 대한제국의 현역 군인이었다.</ref> 의 칼에 찔렸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리는 큰 부상을 당하였고, 왼쪽 폐에 찔려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당한다. 이때 상처는 만년에 [[해수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천식과 폐렴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이완용은 암살될 뻔한 위기를 맞았으나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