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정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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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생애 ===
[[1678년]](강희 17년) [[12월 13일]]에13일에 [[북경]] [[자금성]] 동육궁 중 하나인 영화궁(永和宮)에서 덕비(德妃) 오아씨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윤진은 학문에도 관심이 있어 황자들의 교육 기관인 [[상서방]](上書房)에서 유교의 경전과 불경을 고루 암송하였고 무예와 사냥을 학문보다 더 좋아하는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안 강희제는 윤진을 비롯한 황자들이 깊숙한 궁궐에서 살면 유약해지고 자신만 알게 되어 욕심만 많아지며 퇴폐적으로 변할 것을 염려하여 밖에 자주 데리고 나갔다. 부황인 강희제는 윤진을 엄격히 가르쳤으며, 모험심이 강한 윤진은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다. 윤진의 활솜씨는 가히 황자들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여 80근의 강궁을 능히 다루어 백발백중이었다. 이를 곁에서 본 강희제가 사냥에는 언제나 윤진을 데리고 나갔다고 한다.<ref>Mod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년]]. {{ISBN|0-674-01212-7}} 888쪽</ref> 또한 윤진은 황자로서 강희제의 북경의 민정시찰 미행과 남쪽 순행을 수행하였다. 강희제의 셋째 황후인 [[효의인황후]](孝懿仁皇后)는 자식이 없었는데, 윤진을 매우 총애하여 양자로 삼기도 하였다.<ref name="소동자">{{웹 인용| url =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0675| 제목 = 예언 속의 ‘원명거사’, 옹정제|확인일자= 2008-09-05| access작성년도= 2008| 저자 = 소동자| 저자링크 = |날짜= 2008-06-01|형식= HTML|발행인=대기원시보|언어= |원본일자= |인용= }}</ref> 효의인황후는 [[1689년]](강희 28년) 죽을 때까지 윤진의 교육에 신경을 쓰고 강희제가 정무를 보는 도중에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오는 등 강희제의 잔시중을 들게 하여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ref name="소동자"/> 12살이 되는 그 해에 윤진은 황족 중 세 번째로 높은 작위인 [[패륵]](貝勒)에 봉해졌다.
 
[[1696년]](강희 35년) 강희제의 몽골의 칸 [[가르단]] 원정 때 정홍기(正紅旗) 부대의 명예대장이 되어 몽골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알타이 산맥]]에 숨어 있던 가르단을 추격하던 도중에 가르단 군대의 기습이 있었으나 이를 물리치고 역으로 가르단의 군대를 섬멸하였다. [[1698년]](강희 37년)에 윤진은 가르단의 군대를 찾아내어 섬멸한 공을 높이 사서 [[군왕]]에 봉해지고 옹군왕(雍郡王)이라 불렸다. 이후에는 주로 내정(內廷)에서 활약하여 병부와 호부의 일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1704년]](강희 43년)에 [[장강]]과 [[황하]]가 크게 범람하자, 강희제는 윤진과 13남 윤상을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세금을 걷어오게 하였다. 윤진은 강희제의 순행 때 여러 번 부황을 수행하여 강남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능력을 믿은 강희제는 윤진을 보냈다. 그 당시 청의 국고는 50만 냥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재민 구제와 치수를 위해 당시 부유한 강남에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탈세를 하고 윤진에게 비협조적이던 30여 명의 강남 관리들을 모조리 파면하거나 멀리 내쫓아버렸다. 이에 독단적이라는 일부 신료들의 비판이 있었으나, 오히려 강희제는 그러한 일에는 상벌을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며 부정부패를 일삼던 관리들을 척결한 윤진을 비호하였다. 윤진은 이들을 파면한 후 압류하거나 일부 부자들이 자발적으로 낸 세금을 이용하여 이재민들에게 신속히 구호물자를 전달하였다. [[1707년]](강희 46년)에 다시 장강과 황하가 크게 범람하자, 3년 전의 경험을 살려 다시 좋은 성과를 냈다.<ref>Lillian M. Li. ''Fighting Famine in North China: State, Market, and Environmental Decline 1690s - 1900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7년. {{ISBN|978-0-8047-5304-3}} 43-45쪽.</ref> 이로 인해 부황 강희제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았으며 [[1709년]](강희 48년)에 황자들 중 최고위 작위인 [[친왕|화석친왕]](和碩親王)을 제수받고 옹친왕(雍親王)이라 불리게 되었다.
 
=== 세력 형성 ===
[[파일:Young Yongzheng.jpg|thumb|right|200px|옹친왕 시절의 옹정제]]
{{참고|강희제|설명=황태자 윤잉의 폐위와 황자들의 다툼의 자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내몽골의 여러 칸들과 신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황태자]] [[윤잉]]이 주색잡기에만 빠져 있고 정신이 이상해져 자신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것을 알리고 황태자를 폐위시켰다. 폐위 직후 윤잉이 군사를 이끌고 강희제가 묵던 천막을 힐끔거리며 강희제를 시해하려 하였다는데,<ref name="왕징룬">왕징룬, 《중국의 황태자 교육》, 김영사, 이영옥 옮김, [[2007년]] {{ISBN|978-89-349-2620-7}}. 281쪽</ref> 사실 이것은 윤잉의 이복형인 윤시가 자신이 슬쩍 군사를 움직이고 그것을 윤잉의 잘못으로 모함하였던 것이다. 강희제는 진실을 알고 나서 크게 후회하며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자신의 죽은 [[황후]]인 [[효성인황후]]에 대한 마음과 사실 윤잉이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황태자로 복위시켜 주었다. 그러나 윤잉은 반성하지 않고 심지어 부황의 비빈들까지도 노렸고 더군다나 일부 비빈을 범하기도 하였다. 이에 분한 강희제는 천인공노할 패륜을 저질렀다 하며 윤잉을 크게 비난하였다. 또한 강희제가 남쪽으로 순행을 갈 당시 강희제를 몰아낼 정변을 주도했다 하여 윤잉을 다시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영원히 서인으로 삼아 함안궁에 유폐하니 그 때가 [[1712년]](강희 51년)이었다.<ref name="염숭년">{{웹 인용
| url = http://book.sina.com.cn/nzt/soc/1100164876_zhengsuoqingcaoshierdi/index.shtml
| 제목 = 청나라 12명의 황제의 진짜 모습(正說淸朝十二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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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eking Lamatempel wanfuge-$.JPG|thumb|left|220px|옹정제가 황자 시절에 거주하던 옹친왕부(雍親王府, 지금의 [[옹화궁]](雍和宮))]]
정국을 읽는 눈이 빨랐던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원래 유일한 적자이자 황태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진 윤잉을 지지하였으나, 윤잉이 폐위되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13황자 [[윤상]](胤祥), 17황자 [[윤례]](胤禮), 자신의 양모였던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대신 양외숙부 [[융과다]](隆科多)와 사천 순무로 있던 장군 [[연갱요]](年羹堯), 그리고 자신의 집사인 [[이위]](李衛) 등을 자신의 세력 안에 두고 부황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다른 황자들과는 달리 은밀히 세력을 넓히려 하였고 공식 석상에서도 정치에 관한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다.<ref>위안타이, 《윤진의 27년 - 胤禛二十七年》, 신랑원창파(新浪原創派), [[2006년]]. 20쪽</ref> 그 중 융과다는 본래 아버지 [[동국유]]와 함께 윤진의 동생인 8황자 윤사의 파당에 속하였으나 내성과 황성의 안위를 책임지는 융과다가 중요한 것을 안 윤진은 치밀한 계산 하에 융과다를 매수하고 자신의 파당으로 영입하였다.<ref>위안타이, 《윤진의 27년 - 胤禛二十七年》, 신랑원창파(新浪原創派), [[2006년]]. 27쪽</ref>
 
윤진의 가장 큰 경쟁자들은 서장자이자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 3남 성친왕 [[윤지]], 8황자 염친왕 [[윤사]], 14황자 순군왕 [[윤제]]였다. 형제들이 자신도 의심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윤진은 자신의 관저인 옹왕부에 틀어박혀 [[승려]]들과 불도를 논하여 정치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였다.<ref name="소동자"/> 그로 인해 윤진은 강희제에게 파당을 만든다는 핀잔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 적게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부황에게는 언제나 충효를 다하며 형제들과는 우애가 깊은 척 하여 강희제가 마음을 놓고 윤진을 허물없이 대하였다. 당시 이부의 관리였던 [[임백안]](任伯安)이라는 사람이 《관가백추도》(官家百醜圖)라는 책을 지었는데, 이 책에는 당시 조정에서 근무하는 고관대작에서부터 무명의 미관말직이 받는 뇌물과 그 양, 그에게 청탁 뇌물 등을 바친 자들의 이름이 상세하고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황자들은 이 책을 이용하여 신료들과 조정을 장악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윤진은 이 책 상자를 찾아내어 불태워버리고 임백안을 능지처참하였다. 부황 강희제는 처음에 크게 화를 내며 윤진을 나무랐으나 윤진은 오히려 이것을 불태우지 않으면 나라에 대혼란이 오고 이것을 악용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보게 된다고 간언하여 강희제는 앞일을 내다볼 줄 아는 윤진을 칭찬하였다.<ref>{{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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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Kangxi Emperor's Last Will and Testament.jpg|thumb|right|250px|강희제의 전위조서]]
[[1722년]] (강희 61년) 12월 초, 강희제는 병이 들어 북경의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 있었다. 이때 강희제는 모든 백성들과 대신들이 쇠약해진 자신을 보면 자신의 병세를 눈치챌까 두려워 모든 대신들의 출입을 통제시키고 황자들 역시 자신의 허락 없이는 창춘원에 들어오지 말라 명하였다. 그 당시에 대신들 중 유일하게 출입이 가능했던 자는 윤진의 심복 중 심복인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와 영시위내대신 [[장정옥]](張廷玉)이었다. 공식 기록인 《[[청사고]]》(淸史稿) 〈성조인황제실록〉에 따르면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 강희제는 3남 성친왕 윤지, 7남 윤우, 8남 윤사, 9남 윤당, 10남 윤아, 12남 윤도, 13남 윤상 등 7명의 황자들과 대신들을 불러 모았고 후계자로 4황자 윤진을 지명한 후 붕어하였다. 당시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용문2|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ref>雍親王皇四子胤禛, 人品貴重, 深蕭朕躬:必能克承大統。著繼朕登基卽皇帝位卽傳位於皇四子胤禛, 即遵典制持服。二十七日釋服,釋布告中外,咸使聞知。</ref>}}
당시 후계자로 4황자 옹친왕 윤진과 14황자 순군왕 윤제 중 고심하던 강희제는 성격이 치밀하고 신중하여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재목이라 여기고 윤진에게 넘긴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의 죽음과 후계자로 윤진을 지목한 것에 대해 많은 가설들이 있다. 역시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에 올랐다는 [[수 양제]]는 부황인 [[수 문제]]를 시해하였다는 증거가 정사인 《[[수서 (책)|수서]]》와 《[[자치통감]]》에 상세히 나와 있어서 양제가 부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는 것이 정사와 야사 모두 일치하나, 야사에서 주장하는 윤진의 강희제 시해는 청나라 정사인 《청사고》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야사에서는 그 당시 강희제의 침전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던 융과다는 윤진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강희제의 유조를 변조하고 강희제를 시해했다는 가설이 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다.<ref name="염숭년"/> 또는 윤진이 직접 강희제를 죽였다고 하나 이 역시 증거가 불충분하다.
 
[[파일:Album of the Yongzheng Emperor in Costumes 8.jpg|thumb|left|200px|양장을 입고 사냥을 나간 옹정제]]
그러나 분명 강희제의 붕어와 윤진의 즉위에 대해서는 여러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대개 다음 황위를 한 황자에게 넘겨주면 조정이나 군을 관장하는 황자에게 넘겨주었어야 하는데 윤진은 강희제 붕어 당시 아무런 군사적 권한이 없었다. 또한 가장 총애받던 14남 윤제는 무원대장군의 작위를 받아 막강한 군권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강희제의 진정한 후계자는 윤진이 아닌 윤제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명한 설은 바로 강희제의 유조가 융과다에 의해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에서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로 고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에도 약간의 황당한 점은 있다. 당시 ‘어조사 우’(于) 자가 널리 쓰이지 않았고 황실 문서에서는 ‘어조사 어’(於) 자만이 쓰였다는 점과 유조같이 중요한 공식 황실 문서에서는 만주 문자(추후 2013년 발견 됨)와 한자를 다 써야 하나, 2013년 만주어와 몽골어로 된 유조가 발견되기 전 한자로만 쓰여진 유조만 세간에 공개되어 있었기에 수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며, 황자들에게는 반드시 태어난 순서에 따라 그 앞에 황(皇) 자를 붙여 써서<ref name="염숭년"/><ref>예를 들어 4황자인 윤진은 황사자(皇四子)로 쓰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었다.</ref> 만약에 윤진에게 넘겨준다 하였으면 황사자(皇四子)로 표기했어야 하나 이렇게 표기하지 않고 사황자(四皇子)로 표기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윤진이 즉위하자 은근히 윤제만을 편애하던 윤진의 모비 덕비 오아씨도 윤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723년]](옹정 원년) 초에 목을 매 자살하였다고도 한다.<ref>그러나 실제로 윤진이 황위에 오른 것은 [[1722년]](강희 61년) [[12월 27일]]이고27일이고, 오아씨가 황태후로 존숭되고 죽은 것은 그 다음 해인 [[1723년]](옹정 원년) [[5월 23일]]이라고23일이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해 초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ref> 그리고 당시 북경 내성의 9개 성문은 내성을 통괄하던 융과다의 명으로 강희제의 사망일인 [[12월 20일]]을20일을 기준으로 6일 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고 한다.<ref name="염숭년"/>
 
또한 윤진이 즉위하게 된 것은 재빨리 정국을 이용하여 즉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윤진이 비록 부황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계자까지는 아니었고 야심이 컸던 윤진이 군사들을 이용하여 부황과 형제들을 살육 또는 감금하여 황제에 올랐다는 설 역시 있다. 일부 사람들은 강희제는 결코 황위 계승의 유조를 남기지 않고 후대 사람이 조작하였다라고 주장하지만<ref name="염숭년"/> 어쨌든 윤진이 강희제의 유조로 인하여 즉위하였으므로 더 이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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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ngzheng as Commoner's dress.jpg|thumb|right|200px|평복을 입은 옹정제]]
강희제 붕어 후 3일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3일]]에23일에 융과다가 유조를 발표하고, [[12월 27일]]에27일에 4황자 옹친왕 윤진이 결국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세종 옹정헌황제(世宗 雍正憲皇帝)이다. 연호는 옹정(雍正)이라 칭하였는데, 여기서 ‘옹’(雍) 자는 자신이 받았던 작위인 옹친왕(雍親王)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화로움을 뜻하며, ‘정’(正) 자는 정의로움과 바름을 뜻하니 옹정은 바로 조화로움 속의 올바름이라는 뜻이다.<ref name="염숭년"/> 많은 사람들은 강희제가 분명 가장 총애한 14황자 윤제를 후계자로 점찍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말수가 없이 조용하던 4황자 윤진으로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것에 의아해 하였다고 한다.<ref>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170쪽</ref> 아버지 강희제가 69세까지 재위하여 옹정제는 이미 즉위 당시 45세의 중년이어서 황제에 오르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였으나 자신의 정치 역량을 서서히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에게 반대한 형제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형제들이 자신을 너무나 많이 음해한 것을 잘 아는 옹정제는 자신의 정책 실행과 그 안정을 위해 형제들을 제거하려 하였다.<ref>위안타이, 《윤진의 27년 - 胤禛二十七年》, 신랑원창파(新浪原創派), [[2006년]] 57쪽</ref> 일단 옹정제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들의 돌림자인 ‘윤’(胤)을 역시 발음이 같은 ‘윤’(允) 자로 고치게 하였다.<ref>‘윤’(胤) 자는 후계자를 뜻하기 때문에 강희제의 후계자로 황위에 오른 옹정제가 자신이 유일한 후계자로 선포하고 모두 형제들의 돌림자를 바꾼 것이다.</ref> 그 후 옹정제는 어머니인 덕비 오아씨를 [[황태후]]로 존숭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던 윤사, 윤당, 윤아 등을 각각 염친왕(廉親王), 혁군왕(奕郡王), 돈군왕(敦郡王)에 봉하여 안심시킨 뒤, 윤사를 총리왕대신(總理王大臣)으로 임명하여 같이 정사를 의논하게 했다. 특히 옹정제는 윤사를 자주 불러 정사를 의논하는 척 했으나 사실은 윤사와 그 파당간의 연락하는 시간을 줄여서 함부로 모의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사가 여전히 자신의 파당과 음모를 꾸미자 옹정제는 형제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옹정제의 형제 숙청에 의해 13제 윤상과 17제 윤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형제들은 홀대를 받다가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13황자였던 윤상은 이친왕(怡親王)으로 봉해져 총리왕대신으로 옹정제와 정사도 논의하는 등 승승장구하였고 [[1730년]](옹정 8년) 병사했을 때에도 옹정제가 매우 슬퍼했을 만큼 윤상에게 큰 신뢰를 가졌다.<ref name="Mode889">Mod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1999년]], 889쪽</ref>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동복아우 14황자 윤제는 옹정제의 심복 연갱요의 감시를 받아 군권을 강제로 회수당하고 북경으로 돌아와 모든 작위를 빼앗기고 강희제의 능침인 경릉(景陵)으로 내쫓겨 능지기로 살았고 8황자 염친왕 윤사와 9황자 윤당은 옹정제에게 사사건건 반대하였던 것을 계기로 제일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ref>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176쪽</ref> 윤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옹정제의 제위 계승에 대해 불만이 많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옹정제의 3남 홍시(弘時)를 황제로 세우려 하였으나 옹정제에게 덜미를 잡힌 윤사는 태묘에서 관직을 삭탈당하고 폐서인된 채 특별 독방에 하옥되었다.<ref name="Mode890">Mod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1999년]], 890쪽</ref>
 
윤당 역시 옹정제에 대해 크게 불평하여 이를 안 옹정제가 윤사와 떨어뜨리려 일부러 자신의 심복인 연갱요가 있는 [[청해성]]으로 보내 연갱요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가 다시 불러들여 특별 독방에 하옥되었으며 둘 다 [[1727년]](옹정 5년)에 옥에서 독살당하였다. 윤사와 윤당과 같이 행동하던 10황자 돈군왕 윤아는 [[1723년]](옹정 원년), 옹정제가 몽골에 사신으로 가라 명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다가 윤사의 역모 사건이 터지자 잡혀서 작위를 뺏기고 가택에 구금되었다가 [[1737년]](건륭 2년)에야 석방되었다. 한편, 이들과 같이 음모를 모의한 옹정제의 3남 패륵 홍시는 당시 옹정제의 후계자로 급부상하고 있던 4남 [[건륭제|홍력]](弘曆)을 두려워하여 이에 가담하였으나 결국엔 실패로 돌아가고, 그 역시 [[1727년]](옹정 4년)에 옥사하였다.<ref name="Mode890"/>
 
또한 폐황태자였던 옹정제의 둘째 형 윤잉은 함안궁에 갇힌 지 13년째인 [[1725년]](옹정 3년), 유폐된 곳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병사하였다.<ref>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172쪽</ref> 옹정제의 큰 형인 윤시도 [[1734년]](옹정 12년), 유폐된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셋째 형인 성친왕 윤지는 과거 윤잉을 도왔다는 죄로 윤제와 함께 경릉의 능지기로 살다가 후에 이친왕 윤상의 죽음 때, 아우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작위마저 추탈되고 자금성 뒤쪽 [[징산 공원|경산]](景山)에 유폐되어 [[1732년]](옹정 9년)에 사망하였다.
 
윤사와 윤당의 죽음 이후 옹정제는 윤사를 만주 이름인 아기나(阿其那), 즉 개로 이름을 바꾸었고 윤당을 색사흑(塞思黑), 즉 돼지로 이름을 바꾸어 부르도록 하였다.<ref name="염숭년"/><ref>진만러우, 《강희제의 교육 방식 - 向康熙學習》, 하남문예출판사(河南文藝出版社), [[2008년]]. 181쪽</ref>
 
=== 티베트 원정과 군사 정책 ===
[[파일:Armoured Yongzheng.jpg|200px|right|thumb|갑옷으로 중무장한 옹정제]]
옹정제는 아직도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천성]]·[[청해성]] 분지와 [[티베트]]에는 아직도 청나라에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하였다. 티베트는 이미 [[1717년]](강희 56년)에 [[팔기군]]이 원정을 다녀와 승리하였으나 반대 세력은 아직 완전히 와해되어 있지 않았다. [[1727년]](옹정 5년), 옹정제는 일단 자신의 심복이자 과거 사천 순무로 그 곳 사정을 잘 알던 [[연갱요]](年羹堯)를 무원대장군으로 삼고 23만 명의 군사를 보내 티베트군과 싸우게 하였다. 얼마 안 가 연갱요는 티베트와 싸워 대승을 하였고 티베트군은 다시 높은 티베트 고원 지대로 숨었다. 이 승리가 계기가 되어 훗날 옹정제의 아들 [[건륭제]]는 군사를 보내어 [[중가르 칸국|중가르]]와 [[위구르 족|위구르]]를 모두 평정하고 중국 역사상 [[몽골 제국]]을 제외하고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ref>위안타이, 《윤진의 27년 - 胤禛二十七年》, 신랑원창파(新浪原創派), [[2006년]]. 140쪽</ref> 옹정제는 소수의 군사를 보내 준가르군과 싸우게 하였으나 도리어 청군이 전멸당하고 북몽골 고원을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였다. 하지만 [[할하]] 부족의 군사들이 준가르군을 물리쳐 땅을 수복하였다.
 
군사 정책으로 옹정제는 원래 [[친왕]]들이 주도하고 있던 팔기군<ref>양백기·정람기·양람기·정홍기·양홍기 등 하오기(下五旗)였다.</ref> 을 더 이상 황족이 기주(旗主)가 되어 거느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황제 직속에 두고 장군들이 이를 관리하게 하여 황족들이 군사적 수단을 이용하여 황위를 노리지 못하게 하였다. 많은 황족들이 이에 반대하였으나 옹정제는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행하였다. 덕분에 황제가 단독으로 최고 군사 지휘권을 가지게 되어 전선에서 황제의 직속 기관인 군기처로의 보고가 더욱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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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융 사태와 국내 정치 ===
 
옹정제는 가장 먼저 자신을 황제로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한 [[융과다]]가 은근히 아기나로 불려 모든 권력과 작위가 박탈된 윤사와 다시 접촉하자, 군주 기만죄(기군죄(欺君罪))를 이유로 들어 가택 연금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융과다는 [[1728년]](옹정 6년) 화병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막강한 군권을 틀어쥐고 오만방자하게 굴던 서북의 대장군 연갱요에 대해서는 그 작위를 박탈하고 [[1726년]](옹정 4년)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게 명하였다.
 
안으로는 이미 부황인 강희제가 약화시켰던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를 더욱 약화시키고 [[1729년]](옹정 7년)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나 곧 [[군기처]]로 확대·개편하였다. 처음에는 대신들이 교대로 군사에 관한 기밀의 사무를 도맡아 보는 곳이었으나 점차 대신들이 교대로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는 곳으로 변모하여 정보를 시시각각 황제에게 보고하게 하였고 옹정제는 받은 정보와 이에 대한 답을 다시 육부로 보내어 이를 처리하게 하였다.<ref name="Mode893">Mode, Frederick W. ''Imperial China 900 - 1800'', [[1999년]], 893쪽</ref> 본래 대신들이 정사를 논의하는 곳은 상서방으로 태화전 근처에 있었으나 옹정제는 군기처를 자신의 침전인 양심전 근처에 두어 대신들을 시시각각 감시하여 한 대신이 육부를 조종하는 강력한 신권을 차단하고 신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라 복종하기를 원하였다.<ref name="Mode893"/>
[[파일:Jun Ji Chu.jpg|thumb|left|230px|[[군기처]]]]
개인적으로 옹정제는 밤 12시에 자서 새벽 4시까지밖에 자지 않고 이외의 시간은 모두 정무에 할애하는 등 정치에 매우 의욕적인 황제였다.<ref name="김희영318">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18쪽</ref> 또한, 지방 총독과 순무 등 지방 관리들의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그 의견을 다시 보냈는데, 이때 옹정제는 황제만이 쓸 수 있던 붉은 먹으로 쓴 글씨, 즉 주필(朱筆)로 답장을 보냈고 그 답장을 [[옹정주비유지|주비유지]](朱批諭旨)라 부른다. 이 주비유지는 보내지자마자 바로 시행되었고 이것은 옹정제와 말단인 신하들까지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옹정제는 공식적인 보고 경로와 독자적인 보고 경로를 함께 활용하여 양쪽이 맞지 않으면 추궁하는 식으로 지방관들을 장악하였으며, 이 주비유지를 나중에 모아 책으로 묶어 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로 부르고 지방 관리의 참고서로 삼게 하였다.<ref name="김희영318"/> 또한 자신과 같이 검소한 사람을 좋아하던 옹정제는 자신에게 충성스럽고 검소한 신하들에게 양렴전(良廉錢)을 지급하여 가난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였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유교|유학]]을 그리 신봉하지는 않았고 대신 어릴 때부터 크게 믿던 [[불교]]를 일으켜 과거 자신이 황자 시절에 살던 잠저인 옹친왕부를 크게 중수하여 반은 행궁으로, 반은 [[라마교]] 사원으로 만드니 이것이 [[옹화궁]]이다.
 
옹정제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역시 선교사를 그리 총애하지 않았는데 [[1724년]](옹정 2년), 기독교 포교 규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을 [[마카오]]로 강제 소개시켜 그들이 더 이상 궁정에서 일할 수 없게 하였다. 다만, 오랫동안 궁정에서 일하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등 일부 선교사들은 자리를 지켰다.
 
옹정제는 아버지인 강희제가 세운 청나라의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더욱 발전시키고 안정시켜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아버지의 정책을 잘 이어갔으며 세금을 단일화하여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고, 강희제 말기부터 시작되어 온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1721년]](강희 60년) 700만 냥밖에 없던 국고가 [[1730년]](옹정 8년)에는 3천만 냥, 그 후 말년인 [[1735년]](옹정 13년), 국고에는 은자 6천만 냥이나 있었다고 한다. 옹정제의 치세 동안 원정이 있었고 1년 동안의 군비가 100만 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옹정제의 강력하고 안정적인 내치로 세수가 금방 걷히게 되어 재정위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강희제가 이미 부분적으로 시행한 [[지정은제]]도 옹정제의 치세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 문자의 옥 ===
[[파일:Emperor Yongzheng.JPG|thumb|right|200px|말년의 옹정제]]
옹정제는 아버지 때에 비해 대대적인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는데 [[1726년]](옹정 4년), [[강서성]] 과거를 책임지는 관리로 내려가 있던 시험관 [[사사정]](査嗣庭)이 과거의 시제로 《[[시경]]》의 ‘유민소지’(維民所止)를 택하였다. 그러나 이 시제는 엄청난 파란을 몰고 왔는데 바로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으로 이것이 바로 옹정제의 목을 베겠다는 뜻으로 들려 분노한 옹정제는 사사정과 그 구족을 처형하였다. 또한 한림원 학사 서준(徐駿)은 올리는 상소문 중 ‘폐하’(陛下)의 ‘폐’(陛) 자를 들개를 뜻하는 ‘폐’(狴) 자로 바꾸어 써서 삭탈관직되었으나, 도리어 문자도 모르면서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친다면서 옹정제를 비아냥거리는 내용의 시를 짓자, 진노한 옹정제는 서준을 참수형에 처하였다.<ref name="김희영320">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0쪽</ref>
 
한편 강남의 선비 중 [[증정]](曾靜)이란 자가 노골적으로 청나라와 만주족의 정통성을 비난하고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으로 절강총독으로 있던 [[악종기]](岳鍾琪)에게 옹정제의 즉위 과정을 찬탈이라 하고 악비의 후손으로서 청나라의 편에 서는 것이 옳은 것이냐며 옹정제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자 악종기는 증정을 잡아 북경의 옹정제에게 보내 누가 그런 짓을 사주하였는지 심문하였다.<ref name="김희영319">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19쪽</ref> 증정은 이에 이미 죽은 명나라 말엽의 학자 [[여유량]](呂留良)의 [[화이론]]에 감명받아 날조하였다고 실토하였다.<ref name="김희영319"/> 옹정제는 증정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책을 지어 청나라가 왜 중국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당한 이유를 주장하였다.<ref name="김희영319"/> 옹정제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반성한 증정을 살려주었지만 증정에게 영감을 준 여유량의 가문을 모두 잡아들여 그 구족을 멸하고 여유량의 시체를 그 무덤에서 파내어 [[부관참시]]하였다.<ref name="김희영320"/> 하지만, 증정 또한 이후 건륭제 시기에 능지처참형을 당하였다.<ref>김희영, 《이야기 중국사 3》, 32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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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문의 최후 ===
[[파일:Xiling2.jpg|thumb|left|220px|옹정제의 능침인 태릉]]
[[1735년]](옹정 13년) 10월에 옹정제는 과로로 인하여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리하여 이궁인 [[원명원]]에서 요양을 하며 지냈다. 옹정제는 아버지가 매우 좋아하던 창춘원 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사한 원명원을 더욱 좋아하였다. 옹정제는 황위에 오른 이래 한 번도 순행을 떠난 적이 없고 북경에서 정사를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심신이 지쳐 있을 때는 남방에서 가져온 식물들을 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오랫동안 4시간밖에 자지 않고 정무에 몰두한 탓인지 급격히 기력은 쇠약해져갔다. 〈세종헌황제실록〉에 따르면 [[1735년]](옹정 13년) [[10월 5일]]까지는5일까지는 건청궁에서 조회를 주관하며 일일이 대신들에게 질의를 하였으나 다음 날인 [[10월 6일]]에6일에 병세가 나타나, 그 다음 날인 [[10월 7일]]에는7일에는 걷잡을 수 없이 위독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1735년]](옹정 13년) [[10월 8일]] 새벽에 옹정제는 58세로 붕어하였다고 공식 발표되었으나, 이에 대해서 암살설과 독살설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암살설 중에서는 옹정제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기고하여 문자의 옥으로 멸문을 당한 산동성 출신의 학자 여유량의 손녀 [[여사랑]](呂四娘)이 [[명나라]] 말기의 학자 [[황종희]]의 아들과 명나라 황실의 후손인 여협 오인법사에게 무술을 배워 원명원에 궁녀로서 잠입, 옹정제의 목을 베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고 유력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ref>강효백, 《협객의 나라 중국》, 한길사, [[2002년]], {{ISBN|89-356-0109-8}}.</ref> 다른 설로는 [[도교]]의 가르침에 심취해 [[진 시황제]]처럼 불로장생을 꿈꾸다가 수은이 들어간 단약(丹藥)에 중독되어 사망하여서 뒤이어 즉위한 건륭제가 도사들을 궁정에서 몰아내었다는 설 등이 있다.<ref name="염숭년"/>
 
[[묘호]]는 국가의 전성기를 이어가고 조부와 부황의 뜻을 이어받았다 하여 세종(世宗), [[시호]]는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이다. 옹정제 역시 아버지처럼 나라를 전성기를 지키고 이어갔다 하여 ‘문무’(文武)의 시호를 받았으며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은 공을 사서 헌황제(憲皇帝)라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