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좌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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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애를 바탕으로 정국 운영에 관여했다 쫓겨났다는 것인데 구이신왕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팔수부인(八須夫人)이 해씨로 추측되기 때문에4 이마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해수(解須: 생몰년도 미상)
부여신의 뒤를 이어 상좌평에 임명된 인물은 406년 내법좌평으로 임명된 해수이다. 이는 전지왕 옹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해씨가 -상좌평이 명목상의 지위라고 해도- 정점에 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해수에 대한 기록이 없고 해씨에 대한 기록은 47년 뒤인 문주왕 대의 병관좌평 해구(解仇)에서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비유왕-개로왕 대의 해씨 세력의 행보를 알기 어렵다.
 
다만 455년 비유왕의 의문사와 458년 개로왕이 송에 보낸 조서를 통해 짐작하자면 해씨 세력은 개로왕의 왕권강화 과정에서 밀려났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458년 개로왕은 송에 사신을 보내 11명의 신하에 대한 봉작을 요청하는데, 이들 중 8명은 백제왕족이고 여곤(餘昆)과 여도(餘都)는 각각 개로왕의 형제인 곤지와 문주왕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문주왕 원년기록을 통해 문주왕은 개로왕이 즉위하고 상좌평에 임명된 것을 봤을 때 비유왕의 죽음과 함께 해씨 일족이 일시적으로 실권했을 가능성이 크며, 해씨 세력의 공백을 개로왕은 종친세력의 기용으로 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주왕(文周王) 부여모도(扶餘牟都: ?~477, 재위: 475~477)
훗날 백제의 문주왕으로 기록된 부여모도는 개로왕의 동생으로5, 문주왕 즉위기사에 따르면6 개로왕의 즉위와 함께 상좌평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문주왕은 한성 함락(475년) 시점까지 상좌평 직을 역임했다. 그는 신라로 파견되어 구원군 1만을 얻어 백제로 향했으나 한성은 이미 함락된 뒤였고, 폐허가 된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해 문주왕으로 즉위했다.
 
문주왕으로 즉위한 그는 동생인 부여곤지를 내관좌평에 임명해 정치를 보좌하게 했으나 곤지가 477년 7월 사망한 뒤 문주왕 또한 동년 9월 군사권을 바탕으로 횡포를 일삼던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동성왕 대까지 이어졌다가 무령왕 대에 안정되었다.
 
사택기루(沙宅己婁: 생몰년도 미상)
사택기루는 백제 성왕(?~554) 대의 인물로《일본서기》 흠명기 4년(543년) 중좌평(中佐平) 목례마나(木刕馬那), 하좌평(下佐平) 목윤귀(木尹貴) 등과 함께 백제 군신들이 회의에 참석, 왜가 요청한 임나부흥 안건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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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사택기루의 상좌평에 대해 당시 백제가 3좌평 체제였으나 이후 추가되어 6좌평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사택지적(砂宅智積:?-641년 11월/654년 11월)
사택지적은 백제 무왕·의자왕 대에 활약한 인물로 직위는 대좌평(大佐平)이 이르렀다. 금석문과 역사서 모두 기록이 검증되는 인물로, 학계에서 대좌평 지적=사택지적을 동인인물로 보고 있다. 그는 《일본서기》에 따르면 642년 7월 그의 아들과 함께 일본에 방문했다고 하는데, 이미 641년 11월 사망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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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건 무왕·의자왕 대의 사택씨는 미륵사 금동사리봉안기의 사택적덕의 딸이 백제 무왕의 왕후가 되었고 의자왕 시기에도 사택손등과 사택천복이 좌평을 역임하는 등 권세가 절정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사택천복(沙宅千福: 생몰년도 미상)
백제의 마지막 대좌평이라 할 수 있는 사택천복은 660년 7월, 백제멸망과 함께 의자왕과 부여융 및 왕족과 대신, 장수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성씨가 생략되고 '천복(千福)'으로 등장하고 《삼국유사》 역시 삼국유사에는 '정복(貞福)'으로 등장하는데, 당평제비(唐平濟碑)는 '사타천복(沙吒千福)', 《일본서기》는 '사택천복(沙宅千福)'으로 등장해 그의 성이 사(沙)씨 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