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이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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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씨는 [[조선]]시대 [[종묘배향공신]] 1명을 배출했다. 이밖에 문과 급제자 188명, 상신 5명, 문형(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0명이 나왔다.
 
하지만 윗글은 단순히 설화로 보이며, 대한민국의 성씨는 고려시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대중화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성씨가 있던 양반의 비율은, 조선초기 10%이하 ~ 조선후기 50%이하이며 , 따라서 성씨가 없던 50~60%의 노비천민들은, 일제시대 1909년 일본의 성씨 부여 정책, 즉 민적법 시행으로 , 노비천민들도 마음대로 원하는 성씨와 본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비천민들은 족보에 올릴 조상들이 없었으니 , 생각해낸게 설화를 그럴싸하게 만들거나, 과거 중국의 유명인물이나 한반도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끌어다가 , 자기족보에 선착순으로 올려서 성씨와 본관을 이어붙이는 행위가 성행하였고 , 이러한 족보세탁 작업중에 조상이 서로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많아 , 어쩔 수 없이 생면부지의 사람(노비천민들끼리)들끼리 족보를 합쳐서 같은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 합본행위도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조선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성씨들만 진짜 양반성씨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고려왕건이나 조선왕조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성씨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