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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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계열 잡지인 《가톨릭 청년》은 "조선 가톨릭의 묵상과 반성의 시기는 이미 지났고 행동의 시기에 직면하였다"라고 말하며 '가톨릭 액션'에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이는1947년 9월 [[교황 비오 12세]]가 '이탈리아 가톨릭 행동대회'에서 "반성과 계획의 시대는 지났다. 행동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라고 말한 것을 약간 변형한 발언으로 가톨릭액션은 이미 1930년대부터 도입되어 실천되고 있었다. 일제시대의 가톨릭 액션은 남녀 청년회 조직을 주기반으로, 언론 출판(잡지들의 창간), 의료(성모병원 설립 등), 교육(동성학교 인수, 야학 개설 등)의 영역에 집중하였다.
 
해방 후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동이 빈발했다.
평신도 지도자들의 정당 가입, 교회 차원의 선거 참여, 기존 정치인들과의 교류와 연대 등으로 적극 정치에 참여하였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선택한 정당은 미군정 시절 여당이자 보수세력을 대표하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이었다. 교회 일각에서는 더 나아가 아예 가톨릭 정당을 결성하자는 주장도 제기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민주의원과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 [[장면]]을 천주교 대표로 참여시켰으며, 1948년 제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나서서 신자들의 출마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특히 장면은 사실상 '서울교구의 공천'으로 출마하였고, 장면을 비롯하여 천주교 신자 입후보자들을 당선시키기 위해 모든 가톨릭교회 조직과 언론을 총동원하여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명동성당]]에서 1946년 2월초 [[비상국민회의]] 회의장으로 제공되는 등 우파 정치세력의 집회장소로 빈번히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치집회가 성당에서 열릴 뿐 아니라 교회가 정치인들을 자주 초대하면서 1945년 연말까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승만]]이 명동성당을 방문하였다. 또 노동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당시 성신대학교 학장이던 윤을수 신부가 1949년 12월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 결성식에 '대한노동조합총연맹'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언론 분야에서는 1946년 전국 일간지인 [[경향신문]]을 창간하여 광대한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또 전쟁중에 [[대구매일신문]]을 인수하여 두 개의 일간지를 발간하였다. 가톨릭 액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종전의 '선교'에서 반공투쟁, 그리고 교회의 정치 사회적 영향력의 직접적 확장으로 바뀌었다.
<ref>강인철《한국천주교의역사사회학》(한신대학교 출판부, P 127~131)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