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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 부여 의열사(義烈祠), 삼충사(三忠祠), 부산서원(浮山書院), 논산 충곡서원지(忠谷書院址), 충장사(忠壯祠)
}}
'''계백'''('''階伯''', 미상~ [[660년]] [[8월 20일]]([[음력 7월 9일]]), <small>일명은 '''堦伯'''(계백), '''階升'''(계승)</small>)은 [[백제]] 말기의 [[장군]]이다. [[660년]] [[신라|나(羅)]]·[[당나라|당(唐)]]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5천 [[군사]]를 이끌고 [[논산시|논산]] 황산서 5만여 명의 [[신라]]군을 맞아 네 차례의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했다. [[부여성충]], [[흥수]]와 함께 [[백제]]의 백제8충신(부여군 팔충리)중 3충신이라 불리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무너져가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킨 충신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 생애 ==
[[660년]] 당의 신구도대총관(神丘道大摠管팔충사에서 제향한다.)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수군과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이 지휘하는 5만 육군이 수륙협공으로 백제를 침공했을 때, 계백의 관등은 달솔이었다. 계백은 대장군으로서 5천 명의 결사대를 뽑아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이때 계백은 "한 나라의 군사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상대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서 모욕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낫다."며 자신의 손으로 식구들을 죽였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병사들 앞에서 [[월 (춘추)|월(越)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만으로 [[오 (춘추)|오(吳)나라]]의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을 언급하며, 용기를 다해 싸워서 국은에 보답하자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세 곳에 나뉘어 진을 친 백제군은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삼국사기》열전) 이에 신라군은 장수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반굴(盤屈)]]을 전장에 내보냈으나 전사하고, 반굴 다음으로 선봉에 나선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관창(官昌)]]은 사로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나이가 어린 것을 감안해 돌려보냈으나, 또다시 백제군 진영으로 쳐들어오자 결국 관창을 잡아 처형했다. 관창의 죽음에 고무된 신라군은 죽을 각오로 백제군을 공격해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전사했다.
 
== 사후의 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