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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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의 분할 ===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ref name="B1">Bury, 1923,[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html#1 1]}}</ref>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아우구스투스 (호칭)|아우구스투스]]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카이사르 (호칭)|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밀리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 원칙을 세웠다.<ref name="BG">{{백과사전 인용|제목=Byzantine Empire|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br />* Gibbon, 1906, II, [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2/PDFs/0214-02_Pt06_Chap14.pdf 200] {{웨이백|url=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2/PDFs/0214-02_Pt06_Chap14.pdf |date=20070614070910 }}</ref>
 
[[파일:Constantine Musei Capitolini.jpg|150px|thumb|[[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ref name="G168">Gibbon, 1906, III, [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3/PDFs/0214-03_Pt04_Chap18.pdf 168] {{웨이백|url=http://olldownload.libertyfund.org/Texts/Gibbon0105/DeclineAndFall/Vol03/PDFs/0214-03_Pt04_Chap18.pdf |date=20070614070902 }}</ref>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2번째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ref name="BE">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1*.html#1 1]}}<br />*Esler, 2000, p.1081.</ref>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ref name="E1081">Esler, 2000, p.1081.</ref>)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ref name="B163">Bury, 1923, [http://penelope.uchicago.edu/Thayer/E/Roman/Texts/secondary/BURLAT/2*.html#5 163]</ref>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황위는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부 양 지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ref name="Br">{{백과사전 인용|제목=Byzantine Empire|백과사전=Encyclopaedia Britannica}}</ref> 동부 제국은 [[다키아]], [[마케도니아 지방|마케도니아]], [[아시아]], [[폰투스]], 오리엔트, [[트라키아]], 이집트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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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 정권 ====
 
1204년 라틴인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서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니카이아 제국]]과 [[에페이로스 공국]]이 들어섰으며, [[알렉시오스 1세 (트라페주스 제국)|트라페주스의 알렉시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기 몇 주 전에 [[트라페주스 제국]]이 성립했다. 세 후계국 중에 에페이로스와 니카이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을 만한 기회가 있었으나 니카이아 제국은 이후 몇십 년간 생존에 급급했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면 아나톨리아 남부 영토 상당수를 잃는다.<ref>{{harvnb|Kean|2006}}; {{harvnb|Madden|2005|p=162}}; Lowe-Baker, [httphttps://web.archive.org/web/20071016205009/http://geocities.com/egfroth1/Seljuqs.htm The Seljuks of Rum].</ref> [[쾨세 다그 전투|1242년~1243년의 몽골의 침입]]으로 [[룸 술탄국]]이 약해지자 아나톨리아에는 [[베이|토후]]들과 [[가지 (전사)|가지]]들이 각자 공국을 이루며 할거해 이 지방에서 로마 제국의 세력도 약화했다.<ref>Lowe-Baker, [httphttps://web.archive.org/web/20091027082448/http://geocities.com/egfroth1/Seljuqs.htm The Seljuks of Rum].</ref> 이때 토후 중 한 사람이었던 [[오스만 1세]]가 후일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제국을 세우나 몽골이 침입하여 니카이아는 셀주크 세력의 공격을 잠시나마 받지 않게 되어 북에 있는 [[라틴 제국]] 공격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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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ptember byzantinisch.jpg|thumb|left|250 px|[[9월]]의 우의적 묘사. 11세기경]]
 
로마 제국의 경제는 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단계가 가장 발전되어 앞서 있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까지 로마 제국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행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해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나라에서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이용한 국가에 의거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쳤으므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타국과 한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비단길]]의 서측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최강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출처|날짜=2013-06-18}}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로마 제국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부흥해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은 화려를 과시했고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이 인상받았으나 경제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일체가 달라졌다.<ref name="M532">Magdalino ''in 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532]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20.pdf |date=20080625192523 }}<!-- application/pdf, 531963 bytes -->}}</ref> [[팔라이올로고스 황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로마 제국은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의 상공업 발전에 밀려나 제국 내 산업은 쇠퇴헤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에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영향력을 잃었고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ref name="M806">Matschke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805–806]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37.pdf |date=20080625235853 }}<!-- application/pdf, 262093 bytes -->}}</ref>
 
교역은 제국의 경제 기반이었다. 섬유는 최요한 수출품이었을 텐데 특히 [[비단]]은 이집트에 수출됐고 불가리아나 서방에서도 유통되었다.<ref name="L723">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36.pdf 723]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36.pdf |date=20080625235908 }}</ref> 국가는 국내외 무역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며, [[화폐 주조]]를 독점하였다. 행정부는 금리도 직접 통제하였고 [[길드]]나 조합의 활동도 제한했다. 황제와 제국 관리들은 수도의 물자 공급을 확실히 하고 곡물 가격을 억제하고자 위기 상황에 때때로 개입하기도 하였으며, 행정부는 세금을 이용해 잉여량을 저장했다가 공무원 급료나 공공 사업 투자로 재유통하기도 하였다.<ref name="L3-4">Laiou (2002), [http://www.doaks.org/EconHist/EHB01.pdf 3–4] {{웨이백|url=http://www.doaks.org/EconHist/EHB01.pdf |date=20080625235933 }}</ref>
 
주요 산업인 [[농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별로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서유럽보다 고도 농업 기술이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2세기부터는 서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농업 기술이 개선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눈에 띄게 낙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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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onstantinopol.jpg|200px|thumb|[[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문장]]
 
[[조지프 라야]]는 "로마 문화와 [[동방 정교회]]는 같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ref>Raya, [http://rumkatkilise.org/rayabyzantium.htm#cooliris The Byzantine Church and Culture] {{웨이백|url=http://rumkatkilise.org/rayabyzantium.htm |date=20081009091253 }}</ref> 동방에서 제국이 존속하면서, 황제는 교회의 일에 적극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마 국가는 고대 종교 시대에서 일상으로 종교와 관련한 행정ㆍ재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우스]]가 고안한 모범에 따라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나 전령으로 간주됐으며, 황제는 타 종교인에게 기독교를 선교하고 행정이나 재정을 위시해 종교 "외부상" 일을 맡는다고 보았으나 황제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고정된 형태로 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ref name="M14">Meyendorff, 1982, p.13.</ref>
 
로마 제국의 기독교도는 제국사를 통틀어 통일된 상태였다는 주장은 기독교를 향한 일반인의 오해이다. 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절대로 제국 전체의 모든 기독교도를 대표한 적이 없었다. 5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보급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제국 교회를 분열시켜 오늘날 [[아시리아 동방 교회]]로 이어졌다. 6세기에 교회의 대분열 당시 [[오리엔트 정교회]]가 [[칼케돈 공의회]]의 선언에 반대하여 제국 교회에서 떨어져나갔다. 5세기에 로마가 몰락한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대개 서유럽 게르만족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초기 제국에는 이들 종파와 더불어 [[아리우스주의]]나 타 기독교 분파도 있었으나 제국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동방 정교회는 제국에 남은 기독교도 대부분을 대표하게 되었다. [[유대교]]도 제국사에서 중요한 소수 종교였다. 이들은 박해받는 시기도 있었으나 대부분 시기에는 보통 용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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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 ===
 
[[고대]]의 저작들은 로마 시대에도 계속 장려되어 로마의 학문은 [[고대 철학]]과 [[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ref>Anastos (1962), 409</ref> 로마 제국에서는 과학을 응용하는 면에서 여러 번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나(유명한 사례로 [[성 소피아 성당]]을 들 수 있다), 6세기 이후 로마의 학자들은 고대 저술가의 사상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발전하는 측면에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ref>Cohen (1994), 395<br />* Dickson, [http://www.roma.unisa.edu.au/07305/medmm.htm Mathematics Through the Middle Ages] {{웨이백|url=http://www.roma.unisa.edu.au/07305/medmm.htm |date=20080513152720 }}</ref>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역병이 창궐한 후 아랍인이 침략하는 등 특히 혼란기에 학문은 정체되었으나 제국이 천 년을 넘긴 시점에서 소위 "로마 르네상스"로 로마의 학자들은 특히 [[천문학]]과 [[수학]] 등 아랍과 페르시아의 과학 발전에서 전문가 역할을 자임하였다.<ref>King, 1991, pp.116~118.</ref>
 
제국의 마지막 세기에 로마의 문법학자들은 개인으로서나 저술로서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되게 기여하였다.<ref>Robins, 1993 , p.8.</ref> 이 시대에 [[트라페주스]]에서 천문학과 여타 수리 과학 교육이 이루어졌고 약학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관심하였다.<ref name="TM189">Tatakes-Moutafakis (2003), 18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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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중세 그리스어}}
 
원래 로마의 언어는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는 [[라틴어]]였으나 기원후 7세기경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삼았다.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로 로마 문화에서 의례 부분으로 때때로 나타나는 정도였다.<ref name="ApWr">Apostolides (1992), 25-26<br />* Wroth (1908), Introduction, section 6, cv</ref> 더불어 [[민중 라틴어]]는 제국의 소수 언어고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남부 [[블라크]] 언어의 시초가 된다고 주장한다.<ref>Saramandru, (http://www.ear.ro/3brevist/rv8/art14.pdf {{웨이백|url=http://www.ear.ro/3brevist/rv8/art14.pdf |date=20070927044931 }} Torna, Torna Fratre)<br />* Sedlar (1994), 403-404</ref>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부 지중해 속주를 일시로 회복하면서 라틴어는 학술 언어 뿐만 아니라 일상 구어로 제국에서 계속 쓰였다.
 
궁정, 행정부, 군대를 떠나 동부 로마 속주에서는 [[그리스어]]가 [[서로마 제국|서방 제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 라틴어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수백년간 쓰인 주요 언어였다.<ref>Millar, 2006, p.279.</ref> 그리스어는 기독교 교회, 학술, 예술 분야의 보통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다른 민족이나 여러 속주간 교역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주로 쓰였다.<ref>Bryce (1901), 59<br />*McDonnell, 2006, p.77.<br />*Millar, 2006, pp.97-98.</ref> 라틴어는 한동안 주요 구어인 [[코이네 그리스어]]와 [[양층언어]]로 남았고 코이네는 더 이전 [[아티케 그리스어|문어]]와 공존하다가 표준 방언으로 결국 발전하였다.<ref>''Greek Language'', Encyclopedia Britannica</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