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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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29일]]에는 [[심미자]] 등이 일본 대법원에서 일본군위안부로 인정되었다.<ref>[http://www.independent.co.kr/news/article.html?no=5490 위안부 할머니의 분노 "우리를 앵벌이 삼아 국제망신 그만시켜라"]</ref>
 
[[1994년]] [[8월 31일]]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 富市) [[일본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총리)이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담화를 낸 바 있다.<ref>[http://www.kantei.go.jp/jp/murayamasouri/danwa/asia-danwa.html 内閣総理大臣の談話 平成六年八月三十一日] 首相官邸</ref><ref>[http://www.mofa.go.jp/announce/press/pm/murayama/state9408.html Statement by Prime Minister Tomiichi Murayama on the "Peace, Friendship, and Exchange Initiative" (August 31, 1994)] ([[일본 외무성|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ref> 또한 [[1996년]]에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역시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0476353&cp=nv 아베 “위안부 사죄마음 변함없다”]</ref> 아울러 이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나 양국간 각종 조약([[한일기본조약]] 등) 따위로 법적으로 해결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橋本総理">[http://www.kantei.go.jp/jp/hasimotosouri/speech/1996/0819.html アジア女性基金事業実施に際しての総理の手紙] 首相官邸</ref> 한편 일본 측은 대한민국 정부 또한 미군을 위해 위안부와 비슷한 것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ref>http://www.nytimes.com/2009/01/08/world/asia/08korea.html?_r=1&scp=8&sq=Comfort%20Women%20Korean%20War&st=cse</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635</ref>
 
대한민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와 진상 규명 및 적절한 배상, 책임자 처벌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199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항의하는 [[수요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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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파일:Comfortwoman募集ToBeRecruited.JPG|thumb|1938년 3월 4일 일본군의 위안부 모집에 관한 명령서]]
한국 내 정식 명칭은 일본군“일본군 '위안부'이다‘위안부’”이다. '위안'이라는‘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기 때문에 작은 따옴표를 이용하여 일본군 '위안부'로‘위안부’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 일부에서 '근로정신대'‘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인 '여자정신대'와‘여자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여자정신대는 일본 정부에 징용되고, 일반의 노동을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 반면 일본군 '위안부'는‘위안부’는 일반의 노동 대신에 성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다. '정신대'의‘정신대’의 '정신‘정신(挺身)'은’은 '솔선하여‘솔선하여 앞장선다'는앞장선다’는 뜻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대한민국]] 관계 법령에서는 '일본군‘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피해자’라고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라는‘위안부’라는 용어는 이 제도를 통해 '성적‘성적 위안'을위안’을 받은, 가해자 일본군 중심의 용어라는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어 일본군 또는 정부의 개입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라는 의미도 있다. 피해 여성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성노예'로‘성노예’로 부를 수 있으나 강한 어감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성노예'라는‘성노예’라는 명칭에 부정적이다<ref>{{웹 인용| 제목=제3차 아시아연대회의 결의문| 출판사=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url=http://www.hermuseum.go.kr/include/dwn.asp?idx=51&fileNum=1&s_top=4&s_left=1&s_deps=2&sub_deps=4| 형식=[[HWP]]| 날짜=2006-12-16| 확인날짜=2012-01-16}} [http://www.hermuseum.go.kr/bbs/bbs_view.asp?s_top=4&s_left=1&s_deps=2&sub_deps=4&search_select=all&idx=51 관련 게시물] 및 [http://www.hermuseum.go.kr/include/dwn.asp?idx=52&fileNum=1&s_top=4&s_left=1&s_deps=2&sub_deps=4 영문 결의문]([http://www.hermuseum.go.kr/bbs/bbs_view.asp?s_top=4&s_left=1&s_deps=2&sub_deps=4&search_select=all&idx=52 게시물]) 참고.</ref>.
 
[[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 육군]] 소속의 [[전쟁 정보국 (미국)|전쟁 정보국]]([[:en: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영어판]], 약칭 OWI)의 심리 작전반(Psychological Warfare Team)은 [[1944년]] [[10월 1일]] 청구서로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49.''(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 49호)를 작성했다<ref>[http://www.kananet.com/ianfu/ianfu2-jpkaisetsu.html]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ref>.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 정보부 심리작전반에 의해 버마에서 포로로 한국인 위안부 20명 및 일본 민간인 2명을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종군'이라는‘종군’이라는 말에 내포된 자발적인 의미가 부적절하며 일본 극우 세력에서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명칭이라는 지적이 있다<ref>[http://www.hermuseum.go.kr/kor/cyber/cyber02.htm 위안부란 용어해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ref>.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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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출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
 
 
 
=== 가난 & 가족의 빚 청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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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목록|}}
[[파일:Comfort Women, rally in front of the Japanese Embassy in Seoul, August 2011 (2).jpg|thumb|2011년 8월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하는 위안부 피해자]]
참여 연령대는 모집 당시 기준 17세, 18세에서 30세였다. 이 중 조선인 위안부들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경로가 존재하였다. [[일본]]이 군 공창제로서의 위안소를 설치하고 성노예를 [[일본인]] [[창녀]]나 [[윤락녀]]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식민지]]인 [[조선]] 등의 여성들로 충당하려 했을 경우 종래 극소수밖에 없었던 조선인 [[창녀|매음녀]]만으로 충당하기에는 너무 부족했고 결국 일반 여성을 충당할 수 밖에수밖에 없었다.<ref name="kangman29">강만길,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도서출판 삼인, 1999) 29페이지</ref>
 
첫째는 종래의 색주가, 사창가의 매음녀가 충당된 경우였으나 이는 극히 소수였다. 두 번째는, 일반 여성을 상대로 공공연하게 작부를 모집을 한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많은 경우는 아니었다.<ref name="kangman29"/> 셋째는, 가난한 집안의 소녀들을 상대로 [[일본]] 등지의 공장 여공으로 알선한다고 속여 선금을 주고 데려가 '성노예'로 충당하는 방법이 가장 널리 적용된 것이라 파악된다.<ref name="kangman29"/> 근로정신대에 동원되었다가 중노동과 기아 등을 견디지 못해 탈출했다가 실패하여 강제로 위안부로 편입되었다는 진술도 있다.<ref name="kangman29"/>
 
당시 위안부 업소를 운영하던 이들 중 [[1942년]] 당시 [[중국]] [[상하이]]의 위안부 중개업을 하던 [[조선인]]의 이름이 [[중국]] 상하이 시의 기록을 통해 일부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상하이 시]] 무창로 338번지의 위안부 업소 운영자는 조선인 공돈(일본 이름 永田芳太郞)으로,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 중리 115번지 출신으로,출신이며 [[1940년]] [[4월 4일]]에 [[상하이]]로 건너왔다.<ref name="johson358">박지향, 김철 외,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 (책세상, 2006) 358페이지</ref> [[상하이 시]] 보백로 자운별리 2호에서 위안업을 경영하던 정기천(일본 이름 永川光星)은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출신으로 [[1918년]] [[5월 5일]]에 중국으로 입국했고, 두강지로 보덕리 60호에서 위안업을 운영하던 한차례(일본 이름 大原光江)는 [[경상남도]] [[마산부]] 오동동 13번지 출신으로 [[1937년]] [[11월]]에 입국하였다.<ref name="johson358"/> [[매일신보]]에는 [[경성부]] 종로에서 위안부 중개업을 하던 허씨라는 조선인 여성이 기록에 나타나기도 했다.
 
== 대우와 수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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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慰安婦 敎養講習 伊淡支署主催로2.jpg|left|thumb|300px|[[동두천읍|이담]]지서 주최한 위안부 [[교양]]강습. [[동아일보]] 1961년 1월 31일]]
 
주일 미군을 위한 미군 위안부도 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였던 분들도사람이 미군의 조사를 받은 후, 바로 미군을 위한 위안부로 일한 경우도 있다.
미군의 조사를 받은후, 바로 미군을 위한 위안부로 일한 경우도 많다.
 
[[2014년]] 6월 25일에 [[미군 위안부]] 122명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서 [[강간범|성폭행]], [[감금]], 매춘 강요, [[인신매매]], 마약 투여, 강제 낙태 등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ref name=Reuters20140711a>[http://www.reuters.com/article/2014/07/11/us-southkorea-usa-military-idUSKBN0FG0VV20140711 Former Korean 'comfort women' for U.S. troops sue own government] [[로이터|Reuters]] Jul 11, 2014</ref><ref name=hankyoreh20140704a>[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5560.html “조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 소녀들의 충정은…”]</ref><ref>Adam Justice [http://www.ibtimes.co.uk/tv/former-comfort-women-sue-south-korean-government-11740 Former ‘Comfort Women’ Sue South Korean Government] [[:en:International Business Times|International Business Times]] Jul 11, 2014</ref><ref name=연합뉴스20140625>[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14/06/25/0705000000AKR20140625114300005.HTML '기지촌 여성' 국가 상대 집단 손배소송] [[연합뉴스]] 2014년 6월 25일에</ref> 미군 위안부에대해 [[조선민주여성동맹]]와 [[북한]] 정부는 [[한민족]]에게 범한 반인륜적 의한 위안부 범죄사건 이라고 미국와 한국 정부에 사죄와 책임을 완수하도록 요구하고있다.<ref name="파이낸셜뉴스20140731">[http://www.fnnews.com/view?ra=Sent0801m_View&corp=fnnews&arcid=14073110482136&cDateYear=2014&cDateMonth=07&cDateDay=31 北 ‘미군 기지촌 성매매’ 비난…“인권유린국은 미국”] [[파이낸셜뉴스]] 2014-07-31</ref><ref name="경향신문20140731">[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311349011&code=910303 북한 ‘주한미군 기지촌 성매매’ 비난] [[경향신문]] 2014-07-31</ref><ref name="연합뉴스20140731">[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4/07/31/0511000000AKR20140731077600014.HTML 北 '미군 기지촌 성매매' 비난…"인권유린국은 미국"] [[연합뉴스]] 2014/07/31</ref><ref name="통일뉴스20140808">[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8477 北 여맹, '미군 위안부'에 韓·美 사죄와 책임 촉구] [[통일뉴스]] 2014년 8월 8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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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월 17일에 성립된 히가시구니 내각의 국무 대신 [[고노에 후미마로]](近衛 文麿)는 경시청 총감 자카 신야에게 "일본의 딸을 지켜 달라"고 청원했기 때문에 고개 신야는 일반 부녀를 지키기 위한 '방파제'로서 연합군 군인 전용의 위안소의 설치를 기획하고 8월 18일에는 하시모토 마사미 내무성 경보 국장의 '외국군 주둔지에서 위안 시설에 대해"라는 통지가 나왔다.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22일 연합군을 위해 '특수 위안시설 협회'를 설치했다.
 
패전 후 당장 굶어죽을 형편이었으므로 많은 일본 여성들은 스스로 위안부의 길을 걸을 수 밖에수밖에 없었다.<ref name="su240"/>
 
하야카와 紀代에 따르면 당시 위안소는 도쿄, 히로시마, 시즈오카, 효고현, 야마가타 현, 아키타 현, 요코하마, 아이 치현, 오사카, 이와테 현 등에 설치되었다. 또한 우익 단체의 국수 동맹 (총재 사사 료이치)이 연합군 위안소인 아메리칸 클럽을 9월 18일에 개업했다. 이러한 위안소는 공식적으로 특수 위안 시설 협회라고 불렸고, 영어로는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휴양 & 엔터테인먼트 협회, RAA)로 표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