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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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 대한 다양한 역사서들의 기록 추가 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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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南北國時代)는 [[698년]]는 1784년에 [[유득공]]에 의해 창조된 북부의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발해]]의 건국 이후 남부의 [[한반도]]에 있는 [[신라]]와 공존하던 시대를 일컫는 [[역사]] 용어이다. [[900년]]에 남국인 신라가 분열([[후삼국]])되면서 남북국 형태는 깨어지기 시작하였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요나라]]에게 망하면서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다. 일각에서 '''[[통일신라]] 시대'''(統一新羅時代)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라는 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역사적 동질성을 부여할 수 있는 주변 국가나 영역을 단 한번도 통일한 적이 없다.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인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사관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이신라인들 동족의식을사이에 가지게민족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전쟁 이후, 삼한일통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면서 부터이기 때문에, 당대 신라인,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게는 삼한일통이 적합하다.
 
== 남북국 시대가 오기까지 ==
일반적인 발해가 건국된 지역과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다들 별 문제가 없지만 발해에 대한 정통성이나 문화성 그리고 그 역사관이 어느 나라의 뿌리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구당서]]》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을 고려 별종이라 기록하며 말갈반인 걸사비우와 구분하고 있다.
《[[신당서]]》에서 발해는 대조영이라는 속말말갈인이 세운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에는 발해말갈의 대조영을 고려 별종이라 기록하여, 발해를 말갈로 칭하고있고,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발해의 대조영을 속말말갈인인 동시에 고구려 구장이라 서술하고, 발해를 말갈과 발해에 포함함으로써 외기로 처리했으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등으로 칭함으로써 발해의 주체를 말갈로 인식했다. 결정적으로 신라인이었던 [[최치원]]이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는 본래 보잘 것 없는 말갈의 부락에서 속말이라는 소번의 이름을 가지고있었다는 것을 서술했다.
 
《[[신당서]]》는 발해는 속말말갈이며 성은 대씨라고 기록하여 대조영이 속말말갈인이라 기록하고 있다.
발해가 스스로 남긴 문헌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에 그들의 민족성이나 문화에 대해서 알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남긴 유적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무경총요]]》는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 건국 주체는 581년~600년 사이에 고구려와 마찰을 벌이다 복속된 속말말갈이고, 이들 중 속말말갈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예맥계 고구려의 유민들을 합류시키면서 발해 지배층을 형성한 것이다. 이로써 발해의 지배층이 속말말갈과 예맥이라는 두 연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피지배층으로는 말갈 제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외에 [[위구르]], [[실위]], 해, [[예맥]], [[거란]]인 등읋 구성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오대사]]》는 "발해는 본래 말갈(靺鞨)이라 불렀는데, 고려의 별종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발해의 생활방식은 온돌, 성곽들을 보면, 고구려의 문화를 많이 계승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천손사상을 계승하여, 발해왕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이은 천손임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금사]]》는 "금金나라가 요遼나라를 정벌하자 발해渤海는 [금金나라에] 귀부歸附하였는데, 모두 말갈靺鞨의 후예들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속일본기]]》는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 ,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책부원귀|책부원구]]》는 "진국은 원래 고구려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발해에 대한 여러 사서의 기록들을 모아 소개했는데 다음과 같다.
 
"『통전(通典)』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이다. 그 우두머리인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이라고 불렀다." 라고 기록하였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서기 678)에 고구려의 잔당이 무리를 모아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祚榮)의 성은 대씨(大氏)인데, 남은 군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후 일연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곧 말갈의 다른 종족으로, 다만 분리되고 통합됨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指掌圖)』를 살펴보면, “발해는 만리장성 동북쪽 밖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발해를 말갈의 발해, 발해말갈 등으로 칭함으로써 발해의 주체를 말갈로 인식했다.
 
[[최치원]]은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는 본래 보잘 것 없는 말갈의 부락에서 속말이라는 소번의 이름을 가지고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런가 하면 [[최치원]]은 "총장 원년(668) 영공 서적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부숴 안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의봉 3년(678)에 이르러 그 백성들을 하남과 농우( 右)로 옮겼다. 그러나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 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하여 나라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삼국사기』" 라고 하거나 , "옛날 당나라의 고종 황제가 고구려를 쳐 없앴는데 그 고구려는 지금 발해가 되었다『동문선』" 이라고 하기도 했다.
 
발해가 스스로 남긴 문헌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에 그들의 민족성이나 문화에 대해서 알아 보기 위해서는 그들이 남긴 유적을 통해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발해의 생활방식은 온돌, 성곽들을 보면, 고구려의 문화를 많이 계승했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천손사상을 계승하여, 발해왕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이은 천손임을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허나, 발해의 상경을 비롯한 궁궐이라던지 정치행정 형태가 당나라의 문화와 유사한 점, 육정산 고분군에서 피장자가 고구려와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용한 속말말갈로 볼 수 있는 고분들이 있다는 연구성과로 각국 학계에서는 발해사의 주체를 두고 논쟁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 학계와 대부분의 일본 학계는 발해건국의 주체가 속말말갈이라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발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통해 관심을 받게 되면서 뒤를 이어 대조영이라는 드라마 등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인식에 들어오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역사를 증명하려고 노력 중이다.
 
북한 학계와 일부 소수의 남한 학계에서는 발해건국의 주체가 고구려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남한 학계와 서방의 학계 그리고 일부 일본 학계에서는 발해건국의 주체는 고구려유민과 속말말갈이며 발해를 다민족연합국가로 보고 있다.
 
발해는 속말말갈인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장수 걸걸중상이 이끄는 고구려유민들과,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들이,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을 중심으로 하나로 합쳐지면서 건국되었다.
 
발해 건국 주체는 581년~600년 사이에 고구려와 마찰을 벌이다 복속된 속말말갈이고, 이들 중 속말말갈인 대사리 걸걸중상이 예맥계 고구려의 유민들을 합류시키면서 발해 지배층을 형성한 것이다. 이로써 발해의 지배층이 속말말갈과 예맥이라는 두 연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피지배층으로는 말갈 제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외에 [[위구르]], [[실위]], 해, [[예맥]], [[거란]]인 등읋등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발해를 주목하게 된 것은 서태지의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를 통해 관심을 받게 되면서 뒤를 이어 대조영이라는 드라마 등을 통해서 한국인들의 인식에 들어오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가지게 한국의되었다. 역사를 증명하려고 노력 중이다.
 
== 시기 ==
신라는 [[고구려]] 및 [[백제]]와의 전쟁이 끝나자 내실을 기하기 위해 국가제도를 개혁하였고, 강화된 왕권으로 귀족들을 억눌렀다. 또한 인구 증가와 생산력 향상에 따라 조세가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 무렵 만주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698년, 속말말갈의 추장이었던 [[대조영]]이 대사리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이끌던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인들을 규합하여,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한 뒤 진국을 건국하고, 곧 발해로 국호를 바쑤어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남북국사관에서 [[북국]] 발해와 [[남국]] 신라라는 남북국 시대가 시작됐다.
 
서기 [[900년]], 신라는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의 북부에서 [[후고구려|고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때부터 남부의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남북국 시대의 양상과 사실상 병존하였다. [[918년]]에 [[태봉]]의 [[고려 태조|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로 국호를 환원하고, [[926년]]에 북국인 발해가 멸망하자 남국의 [[고려]]에서는 934년, 발해의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면서 국내에서 삼한을 일통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