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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과 12월에 라샤리테쉬르루아르에서 소규모 전투가 있은 후, 이듬해 4월에 잔은 콩피에뉴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1430년 5월 23일 잔은 마리니에 있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사로잡혔다.<ref name="barbara_geiger1">{{저널 인용| title=A Friend to Compiegne | author=Geiger,Barbara | journal=Calliope Magazine | year=2008 | month=4 | volume=18 | issue=8 | pages=32–34}}</ref> 부르고뉴파에서 6천명을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자,<ref name="barbara_geiger1" /> 잔은 병사들에게 콩피에뉴 성으로 피신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전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를 지켰다.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다. 처음에 잔은 항복을 거부하였다.<ref>DeVries, pp. 161–170.</ref>
 
당시에는 포로자의 국가나 집안에서 몸값을 주고 포로자를 돌려받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에 억류당한 잔을 구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하여 훗날 많은 역사학자가 그를 비난하게 되었다. 잔은 억류되어 있는 동안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였다. 베르망두아에 있을 때는 높이가 21미터나 되는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린 적도 있었는데, 결국 도로 붙잡혀 부르고뉴파에 속한 [[아라스]]로 끌려갔다. 결국 잔은 잉글랜드 정부가 부르고뉴 공작으로부터 1만 리브르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함으로써 팔려갔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간의 잔에 대한 거래에서 [[보베]]의 교구장이자 친잉글랜드파인 [[피에르 코숑]] 주교가 큰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잔을 상대로 한 종교재판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ref>"Joan of Arc, Saint". Encyclopædia Britannica. 2007.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Library Edition. 12 September 2007 <http://www.library.eb.com.ezproxy.ae.talonline.ca/eb/article-27055{{깨진 링크|url=http://www.library.eb.com.ezproxy.ae.talonline.ca/eb/article-27055 }}>.</ref>
 
=== 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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