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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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문장 =
|문장설명 =
 
|작위 = [[중국의 황제 목록|중국 황제]]
|재위 = 기원전 220년-기원전 210년 9월 10일
|즉위식 =
|전임자 = (신설)
|후임자 = [[진 이세황제|이세황제]]
|재상 =
 
|작위2 = [[진 (영성)|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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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2 = [[진 장양왕]]
|후임자2 = (칭제)
|재상2 =
 
|휘 = 성: () <br />씨: 조(趙) 또는 여(呂) <br />명: 정 (政) 또는 조정(趙政, 趙正)
|별호 =
|연호 =
27번째 줄:
|존호 =
|시호 =(없음)
|능호 =
 
|출생일 = 기원전 259년 2월 19일
|출생지 = [[조 (전국)|조]] [[함양]]
|사망일 = [[사구의 변|기원전 210년]] 9월 10일]]
|사망지 = [[진나라|진]] 사구(沙丘; 오늘날의 [[허베이성]] [[핑샹현]])
|매장지 =
37번째 줄:
 
|왕조 = [[진나라|진조]]
|가문 = 강성영성 여씨 (姜姓呂氏)조씨
|아버지 = [[여불위진 장양왕]] ([[여불위]]?)
|어머니 = [[조희 (진 장양왕)|조희]]
|배우자 =
|자녀 = 장남 [[부소]]<br />18남[[공자 고]]<br>[[공자 장려]]<br>말자 [[진 이세황제|호해]] 등
|친인척 =
|종교 = [[법가]]
}}
 
'''진 시황제'''({{zh-cp|c=秦始皇帝|p=Qín Shǐ Huáng Dì}},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는 [[전국 칠웅]] [[진 (영성)|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중국]] 최초의 [[중국의 황제|황제]]이다.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이라 하나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역사 기록대로 이름은 '''여정조정'''(政)이며이다. 혹, 혹은씨는 '''강성여씨'''(姜姓呂氏)이므로, '''강정'''(姜政)이라고도 부른다. <ref>사마천 사기사기에 진시황본기에는보면 [[진진황실이 장양왕]]조(趙)씨를 [[영자초]]의씨(氏)로 아들이라고삼았다는 되어기록이 있으나, 생부라는 내용은친척 없고,국가이긴 출생하지만 부분에당시 대해적국 사마천 사기하나인 여불위조(趙)나라를 열전에의식해 당시과연 세도가 대단하던 [[(趙)를 (전국)|조나라]]의 상인삼았는지 출신의의문이다. [[승상]]정황상 [[여불위]]역시 진(呂不韋)나라는 아들이라는영(嬴)성 역사기록이진(秦)씨 있다.국가라고 당시에도보는 진시황을것이 여정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ref><ref>조정(政)이라고 부르고시황제의 있었으며,이름이라는 이를설이 원나라때까지있고, 어느조가 누구도진나라 반론을황실의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진시황이 강성여씨황실은 라는영성 근거는조씨 여불위는- 강성이며 여씨(姜姓정은 呂氏)로이름이라고 기록되어하는 있으며,설도 중국있다.</ref> 성명은 역사기록'''영정'''이고, 혹 :씨명은 '''吕不韦(前292年—前235年),姜姓,吕氏,名不韦,卫国濮阳(今河南省安阳市滑县)人。 战国末年著名商人、政治家、思想家,官至진정'''(国丞相。政), '''조정'''이며,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설대로 여정(呂政)이라고도 한다. [[진 장양왕|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상국|상방]]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사마천의 사기 中 여불위 열전>에는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을 임신하고 있었던 조희를 정치적 목적으로 진장양왕에 바쳤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12개월이 아닌 대기(大期)('만삭'이라고 해석해야 옳음. 대기는 여자가 아이를 낳을시기를 말함.) 즉, 때가 다 되어서 시황 정(政)을 낳았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여불위의 성을 따랐을경우 '''여정(呂政)'''이며, '영정'이라는 이름처럼 종성을 따라서 '영정'이라고 칭할 경우 여씨의 종성을 따라'''(姜姓 呂氏)''' 즉, '''강정'''(姜政)이 되는 것이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呂不韋)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오늘날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초기 생애 ==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공자 영자초와 그 부인 [[조희 (진 장양왕)|조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원래 조희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희를 아내로 삼았다. 《[[사기 (역사서)|사기]]》 여불위열전에서는 이 과정에서 원래 조희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진시황제를 숨겨주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이는그러나 한나라때부터여불위열전의 원나라때까지기록이 몇년천을사실인지에 이어오는대한 과정에서도논의는 한번도 반론이나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분분하다.
 
어쨌건,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증조부인 [[진 소양왕|소양왕]] 영직이 [[주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소양왕은 얼마 후,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진 효문왕|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즉위한 지 3일만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매우 허약하였다.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 여불위와의 분쟁 ==
 
새로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는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기에, 아버지 때에 승상이상방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으며, 심지어는 시황제의 모친어머니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한다. 이에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에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238년]]에 시황제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시황제는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하였다.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도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황제는 여불위를 승상의상방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237년]]에 여불위는 결국 자결하였으며 시황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하였다.
 
== 전국 통일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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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황제 ==
 
시황제는 국왕(國王)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사와 왕관 등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칭호를 정하게 된다. 처음에 정은 [[도교]]에서 나오는 신비한 칭호인 태황(太皇)과 천황(天皇)과 지황(地皇) 중에서 어느 칭호를 정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이사와 왕관 등은 태황과 천황과 지황 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태황의 칭호를 바쳤다. 결국 고심 끝에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하기로 하였고,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황제로 시작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통일 후, 진시황은 뒤의 신하나 자식들이 아버지나 선군의 시호를 짓는 것이 품위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고 자신의 후대 황제들을 이세, 삼세황제등으로 부르게 지시하였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 (진나라)|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또한,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천하 제일의 산업도시가 되어 발전하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제2궁전,제3궁전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으로 바꾸고,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역사상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천재라고 생각하여,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법은 시황제가 모두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다. 그래서 상소는 함양궁에 산더미처럼 쌓여졌다. 상소는 저울로 달아졌고, 결재량은 하루에 1석(30kg30&nbsp;kg)으로 정해졌다.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시황제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신설하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중국을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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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관계 ==
시황제의 후궁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사후 이세황제가 후궁들 중 자식을 낳지 않은 자는 모두 따라 죽게 하였고, 그 수가 매우 많았다는 기록이 있어 상당히 많은 수의 후궁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된다.<ref>사마천, 《사기》 권6 진시황본기: 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出焉不宜。」皆令從死,死者甚衆。</ref>
 
* 부황 : [[여불위진 장양왕]] '''(姜姓呂氏)'''(생부秦莊襄王)
* 모후 : [[조희 (진 장양왕)|조희]](趙姬)
* 동생 : [[여성교영성교|장안군 성교]]
* 후비 : 호희(胡姬)
* 후비 : 정비(鄭妃)
* 후비 : 옥수비(玉修妃)
* 자녀
** 장남 : [[부소]] (장남)
** [[공자 고]]
** 18남 : [[진 이세황제]] 호해
** [[공자 장려]]
** 18남 : [[진 이세황제]] 호해(말자)
 
<!--이하 내용은 야사가 아니라, 작가의 픽션 아닙니까????.....
 
=== 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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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흐르는 강물처럼》 203 ~ 205쪽}}
 
-->
 
== 전국 순행 ==
줄 189 ⟶ 190:
== 각주 ==
 
{{위키공용분류|Qin Shi Huang}}
<references/>
 
줄 211 ⟶ 212:
|임기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진나라의 황제}}
{{진나라}}
{{기본정렬:시황제, 진}}
 
{{전거 통제}}
 
{{기본정렬:시황제, 진}}
[[분류:기원전 259년 태어남]]
[[분류:기원전 210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