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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낭(郞)을 지냈다가 [[천수군|천수]][[사마 (벼슬)|사마]]·[[하남군|하남]][[도위]]로 승진하였고, 살벌한 통치를 하였다.
 
[[전한 무제|무제]] 말기에 각지에서 도적이 들끓었는데, 이때 전광명은 [[진군 (행정 구역)|회양]][[태수]]에 임명되었다. 한 해 남짓 지나 옛 성보[[현령|령]](城父令) 공손용(公孫勇)과 그의 빈객 호천(胡倩)이 황제의 사자를 사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전광명은 호천의 수작을 알아차려 그를 체포하였고, 공손용도 어현(圉縣)의 관원 [[위불해]]·[[강덕]]·[[소창]]에게 붙잡혔다. 무제는 전광명을 [[대홍려]]로 발탁하였고, 전광명의 형 전운중(田雲中)이 후임 회양태수가 되었다.
 
[[전한 소제 (8대)|소제]] 때, 전광명은 [[익주군|익주]]의 오랑캐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관내후]]에 봉해지고 [[위위]]로 전임되었다. 이후 [[무도군|무도]]에서 일어난 [[저족]]의 반란을 [[마적건]]·[[한증]]과 함께 진압하였고, [[좌풍익]]으로 전임되어 유능한 통치로 명성을 얻었다.
[[정화 (전한)|정화]] 4년(기원전 89년), [[대홍려]]로 승진하고 형 전운중(田雲中)이 후임 회양태수가 되었다.
 
[[원평 (전한)|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전한 선제|선제]]가 즉위하였다. 이때 전광명은 [[채의]]의 뒤를 이어 [[사공 (관직)|어사대부]]로 승진하였고, 선제를 옹립한 공적으로 창수후창수[[열후|후]](昌水侯)에 봉해졌다.
[[시원 (전한)|시원]] 4년(기원전 83년), [[익주군|익주]]의 오랑캐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공적을 인정받아 [[관내후]]에 봉해졌고, [[위위]]로 전임되었다.
 
[[원봉 (전한 소제)|원봉]] 원년(기원전 80년), [[무도군|무도]]의 [[저족]]이 반란을 일으키니 [[집금오]] [[마적건]]·용액[[열후|후]](龍額侯) [[한증]]과 함께 진압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78년), [[좌풍익]]으로 전임되었다.
 
[[원평 (전한)|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전한 선제|선제]]가 즉위하였다. 이때 전광명은 [[채의]]의 뒤를 이어 [[사공 (관직)|어사대부]]로 승진하였고, 선제를 옹립한 공적으로 창수후(昌水侯)에 봉해졌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전광명은 기련장군(祁連將軍)에 임명되어 [[범명우]]·한증·[[조충국]]·[[전순]]과 함께 [[흉노]]를 치러 출진하였다. 수항성(受降城)의 요새에 다다랐을 때 전광명은 수항도위(受降都尉)의 미망인을 [[강간|겁탈]]하였고, 병력은 기일을 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귀환하고 말았다. 이 일로 이듬해 [[태복]] [[두연년]]의 문책을 받았고, 결국 전광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봉국은 몰수되었고, 형 전운중 또한 회양을 다스리는 동안 사람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관원과 백성의 고발을 받아 [[기시 (형벌)|기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