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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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씨개명 전후 ====
[[파일:Sōshi-kaimei Lee Kwang Su.jpg‎jpg|thumb|left|130px|[[1939년]] [[12월 12일]]자 [[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 개명 권고 칼럼]]
{{참고|창씨개명|내선일체}}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창씨개명 시행을 발표하면서 조선인 사회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광수 등은 창씨개명을 공식 지지, 자발적으로 동참할 것<ref name="chang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6966 일제때 산 사람은 다 친일파이고 '척결' 주장에 정치적 고려 있다고? - 오마이뉴스] 2002년 05월 30일자</ref> 을 선언하기도 한다. [[1939년]] [[12월 12일]] 이광수는 [[경성일보]]에 창씨개명에 적극 동참하자는 취지의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ref name="chang01"/> 그의 창씨개명 지지 주장에 무수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창씨개명은 불가피한 일이며 [[일본]]과 [[조선총독부]]는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창씨개명하도록 조처할 것<ref name="yun451">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451페이지</ref> 이라고 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