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 (148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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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金淨, [[1486년]] ~ [[1521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문신으로,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慶州)이다.
 
[[1504년]] 사마시에 합격해 [[150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관료로 재직 중 다시 정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조광조]]와 미신타파와 향악 시행 등 개혁 정치에 힘쓰다가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다가 사형당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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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죽자 그는 중종 반정으로 왕후자리에서 쫒겨난 신씨를 다시 맞아들이자고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김정은 고향땅인 보은의 함림역(현, 보은읍 학림리)으로 유배되었다. 순창군수로 있던 중 그는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다가 산증으로 사망했는데, 이때 일부 조정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숙의 박씨]]를 천거했다. 그러나 김정은 담양부사로 있던 박상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그리고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1516년]]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대사헌]],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조광조]]와 미신타파와 향악 시행 등 개혁 정치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몰락해 충청도 금산으로 유배, 다시 [[제주도]]로 유배당했다가이배되었다가 위리안치(圍離安置)된 뒤, [[사약]]을 받고 사형당했다사사당했다.
 
폐비 신씨를 복위하는 데 적극 나서는 등 절의에 뛰어났다는 평가, 형조판서에 있을 때에 감옥에 수인(특히 출세한 천인)들이 넘쳐나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특별조사까지 받았던 무자비한 관료였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시화에 능했으며 문집에는 《충암문집》, 저서에는 《제주풍토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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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순창 삼인대]]
* [[조광조]]
* [[김식]]
* [[박상]]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