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138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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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생애 ===
[[1389년]](고려 창왕 1)에 [[경상도]] [[선산군|선산]]에서 태어났다. 김숙자는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당시 [[조선]] 유학자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윤상은 다시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인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 [[역성혁명]]을 반대하다가 [[예천]]에 유배되어 오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杠) 등과 함께 조용을 찾아가 그를 사사하여 문인이 되었다. 김숙자는 [[길재]] 외에도 윤상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정몽주]]의 학통을 이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는 곡한한씨 한변(韓變)의 딸과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다시 밀양 박홍신(朴弘信)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러나 이는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 관료 생활 ===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23년]](세종 5) [[7월]] 성균 직학(成均直學)이 되었을때, [[사헌부]]가 [[세종대왕]]에게 그가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망령되이 서얼(庶孽)이라 일컬어 아무 까닭도 없이 버려 이별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대를 치라는 계를 올렸다.<ref>세종실록 21권, 1423년(세종 5년, 명 영락 21년) 7월 4일 임오 3번째기사, "성균 직학 김숙자를 처벌하다"</ref>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1438년]](세종 20) [[10월]] 내자 주부(內資主簿)로 재직 중 서연 정자(書筵正字) 직에 겸임되었다. 이때 사간원 좌정언 이예장(李禮長)으로부터 전에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고 죄를 얻어 침체되었다가, 이제 죄를 용서 받고 다시 벼슬길이 열렸사오나 잘못을 뉘우치는 행적을 듣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ref>세종실록 83권, 1438년(세종 20년, 명 정통 3년) 10월 26일 정축 2번째기사, "음사는 본궁의 은밀한 곳에서 행하도록 하다"</ref>
 
집현전 주부(注簿)로 있다가 [[1439년]](세종 21) [[4월]] [[이조]]에서 그를 동부 교수관(東部敎授官)으로 발령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탄핵 상주를 올려, 왕명으로 사유록(師儒錄)에서 삭제당하였다.<ref>세종실록 85권, 1439년(세종 21년, 명 정통 4년) 4월 14일 신묘 8번째기사, "김숙자를 사유록에서 삭제하다"</ref>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 생애 후반 ===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