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자 (138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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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자'''(金叔滋, [[1389년]] [[8월 24일]] ∼ [[1456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f name="김숙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숙자(金叔滋),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윤상 (조선)|윤상]](別洞 尹祥)의 문인이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 [[1419년]](세종 1)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본처와의 이혼 경력으로 요직에 임명될 때마다 거듭 [[사헌부]]에서 논계하였다. 사예(司藝)에 이르러 관직을 사직하고 [[1456년]]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가 여생을 보냈다. 아들이자 문하생인 [[김종직]]을 통해 [[정몽주]]의 학통을 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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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초기 생애 ===
[[1389년]](고려 창왕 1)에 [[경상도]] [[선산군|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태어났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ref name="김숙자"/>
 
김숙자는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당시 [[조선]] 유학자 별동 윤상(別洞 尹祥)이 황간현감으로 임명되어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윤상은 다시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인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 [[역성혁명]]을 반대하다가 [[예천]]에 유배되어 오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杠) 등과 함께 조용을 찾아가 그를 사사하여 문인이 되었다. 김숙자는 [[길재]] 외에도 윤상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정몽주]]의 학통을 이었다. 그밖에 그는 조용, 김말 등과도 교류하였다.
 
[[1407년]](태종 7) [[개성]]으로 가서 개경사마시(開京司馬試)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ref>佔畢齋集彝尊錄 佔畢齋集彝尊錄 (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先公紀年第二</ref> 그는 곡한한씨 한변(韓變)의 딸과 결혼했으나 이혼하고 다시 밀양 박홍신(朴弘信)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러나 이는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 관료 생활 ===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417년]](태종 17) 봄 중성균시(中成均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그 해의 회시(會試)에는 낙방하였다.<ref>佔畢齋集彝尊錄 佔畢齋集彝尊錄 (上) 子通訓大夫前善山都護府使宗直撰, 先公紀年第二</ref> [[1419년]](세종 1) [[과거 제도|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23년]](세종 5) [[7월]] 성균 직학(成均直學)이 되었을때, [[사헌부]]가 [[세종대왕]]에게 그가 자식이 있는 조강지처를 망령되이 서얼(庶孽)이라 일컬어 아무 까닭도 없이 버려 이별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대를 치라는 계를 올렸다.<ref>세종실록 21권, 1423년(세종 5년, 명 영락 21년) 7월 4일 임오 3번째기사, "성균 직학 김숙자를 처벌하다"</ref>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는 관료생활 외에도 [[소학]]부터 경학 등 학문을 가르쳤고, 아들 [[김종직]] 외에도 탁중(卓中), [[이재인 (조선)|이재인]], 손조서(孫肇瑞) 등의 문인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김숙자의 문인 중에서 우수한 제자 9명은 세칭 아홉 현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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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그 뒤에 사예(司藝) 되었으나거쳐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되었으나, [[1456년1455년]] [[12월]] 사직하고 [[1456년]]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해 [[3월 2일]]에 [[밀양군]] 대동리 정침에서 죽었다. [[1455년]](세조 1년) [[12월 12일]] [[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관료들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으로 포상할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