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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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순조 12) [[8월]] [[사옹원]][[봉사]] 박종일(朴鍾一)과 한광우(韓光友), 이진채(李振采) 등의 모역사건이 적발되자, [[은언군]]의 아들들 중 한명을 추대하려 했다 하여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조선 순조|순조]]가 사건을 무마시켜 [[풍계군|이당]], [[이성득]], [[이철득]] 등 다른 이복형제들과 함께 사형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뒤 [[강화도]] 내로의 이주가 허용되어 이광은 [[강화군]] 강화읍내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철종의 가족은 [[강화도]]에 살았는데, 철종의 잠저는 현재의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41번지에 있다.<ref>강화경찰서 왼쪽 담옆 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보이는 기와집으로 강화도령 철종(1831-1864)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 까지 살던 곳(잠저)이다.</ref><ref name="chol01">[http://ganghwado.com/YuMul/SiYuHyeongMunHwaJae/YongHeungGung/index.html 강화도령 철종의 잠저 용흥궁]</ref> 원래는 [[초가]]였으나, 철종 4년(1853)에 [[강화부|강화]] [[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하였다.<ref name="chol01"/> 이광의 가족은 부임해오는 [[강화부]] 유수의 감시 및 주민들의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철종실록의 철종 행장에 의하면 그가 [[강화도]]에 있을 당시, 한번은 그가 살던 동리에 완악하고 패려한 자가 [[술]]에 취해 그의 집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오만한 말과 모욕을 가했지만, 후일 아들 [[조선 철종|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문제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강화부]] 유수로 부임한 어떤 유수가 방어 및 지킴(방수)를 목적으로 그의 일가를 감시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므로 집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지만, 왕위에 오른 아들 [[조선 철종|철종]]은 그 유수를 오히려 [[승정원]][[승지]]에 임명하였다한다.
 
[[1817년]](순조 17) [[3월]] [[홍경래]]와 기맥이 닿던 [[채수영]]이 [[은언군]] 인의 아들 중 한 명([[이철득]])을 추대하기로 하고 [[채수영의 난]]을 일으켰다. 그는 이때에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1820년]](순조 20) [[조선 순조|순조]]는 은언군의 생존한 아들들을 모두 석방시켜주었다. 이때 그는 [[한성]]으로 갔지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강화도]]로 보내졌다. [[조선 철종|철종]] 즉위 이후, [[조선 철종|철종]] 때와 [[조선 고종|고종]] 때 [[은언군]]과 은언군 일가, [[상계군]] 일가 등에 관련된 자료는 대부분 세초, 각자, 먹칠, 인멸해버려 전계대원군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확인하기 힘들다. 곧 강화도로 보내졌지만 그는 [[1822년]](순조 22) [[2월]] 다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