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왕녀 메리 (149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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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루이 12세]]<br />[[제1대 서퍽 공작 찰스 브랜든브랜던]]
|자녀 =
|아버지 = [[헨리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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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튜더'''({{lang|en|''Mary Tudor''}}, [[1496년]] [[3월 18일]] ~ [[1533년]] [[6월 25일]])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여동생이다.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으며, 루이 12세가 죽고 나서는 [[찰스제1대 브랜든|서퍽 공작 찰스 브랜든브랜던]]과 결혼하였다.
 
== 첫 번째 결혼: 프랑스 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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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결혼: 서퍽 공작부인 ==
[[파일:Mary_Tudor_and_Charles_Brandon.jpg|thumb|left|메리 튜더와 찰스 브랜든브랜던]]
루이와의 결혼을 기뻐하지 않았던 메리는 서퍽 공작 [[찰스 브랜든]]과브랜던과 이미 거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헨리는 누이의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장래의 어떤 혼인이라도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를 바랐다. 1515년 1월 말, 그는 메리가 잉글랜드로 돌아올 때 그녀에게 청혼하지 않겠다는 브랜든의브랜던의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515년]] [[3월 3일]]에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법적으로 브랜든이브랜던이 헨리의 동의 없이 공주와 결혼한 것은 반역죄에 해당하는 중죄 행위였다. 헨리는 분개했으며, [[추밀원]]에서는 브랜든을브랜던을 체포하거나 처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울지의 중재와 누이와 브랜든에브랜던에 대한 애정 덕분에 헨리는 결국 무거운 벌금을 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두 사람은 [[1515년]] [[5월 13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공식적으로 결혼하였다.
 
재혼한 후에도 메리는 잉글랜드 궁정 안에서 통상적으로 “서퍽 공작부인” 대신 “프랑스의 왕비”로 불렸다. 두 번째로 결혼식을 올린 메리는 남편의 영지인 [[서퍽 주]]의 웨스트허프 홀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브랜든은 네 명의 아이를 두었다:
 
* 헨리 브랜든브랜던 ([[1516년]] [[3월 11일]] ~ [[1522년]])
* [[프랜시스 브랜든브랜던]] ([[1517년]] [[7월 16일]] ~ [[1559년]] [[11월 20일]]), 도싯 후작 [[헨리 그레이]]와 결혼하여 [[제인 그레이]]를 낳았다.
* [[엘레노어 브랜든브랜던]] ([[1519년]] ~ [[1547년]] [[9월 27일]]), 컴벌런드 백작 [[헨리 클리퍼드]]와 결혼하였다.
* [[헨리 브랜든브랜던]] ([[1523년]] ~ [[1534년]] [[3월 8일]]), 초대 링컨 백작
 
1520년 후반, 메리가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려는 헨리 8세의 시도에 반대하자 두 남매 사이는 팽팽한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이미 만났던 미래의 왕비 [[앤 볼린]]을 매우 싫어하였다. 1533년 6월 25일 메리는 서퍽의 웨스트허프 홀에서 죽었으며, 시신은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있는 [[수도원]]에 묻혔다. [[수도원 해산]] 기간에 수도원이 파괴되자 그녀의 시신은 근처의 세인트 메리 성당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