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1세"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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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나탈랴 나리시키나]]
|배우자 = [[에우독시아 로푸키나]]<br />[[예카테리나 1세|마르타 스캅론스카야]]
|자녀 =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br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대공(요절)<br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요절)<br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요절)<br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요절)<br />예카테리나 페트로브나 여대공(요절)<br />[[안나 페트로브나]]<br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러시아 여제 옐리자베타]]<br />마리아 페트로브나 여대공(요절)<br />마르가리타 페트로브나(요절)<br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요절)<br />파벨 페트로비치 대공(요절)<br />[[나탈리아나탈리야 페트로브나 여대공 (1718년)|나탈리아나탈리야 페트로브나]]<br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요절)
|친인척 =
|종교 = [[러시아 정교]]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 (동물)|말]]에 편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하나와 결혼했다. 이때부터 러시아 전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 전제군주가 되다. ====
[[파일:Capture of Azov 1696.png|thumb|left|[[아조프 해]]의 포획]]
[[파일:Peter benois.jpg|thumb|right|[[발트 해]] 기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아이디어를 명상하는 표트르 대제]].
[[파일:Peter in Holland.jpg|thumb|left|[[네덜란드]]에서 조선술을 배우고 있는 표트르 대제]]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기술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부사관]]으로 가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으며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친히 배웠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을 뻗쳤다.
 
==== 서유럽화 정책 ====
[[파일:KLEIDERREFORM IN RUSSLAND.jpg|thumb|right|남자들의 수염을 깎는 모습]]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했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또한 젊은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히게 했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 전쟁 ===
==== 스웨덴과의 대결 ====
 
그러나 칼 12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7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고 불리던 [[영국]]마저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항코 해전([[1714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해 핀란드를 강타했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숙적 칼 12세도 [[1718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했고,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2세의 처남 [[프레드리크 1세]]는 모스크바에 강화를 요청해 1721년에 [[대북방전쟁]]은 모스크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루스 차르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표트르에게는 [[임페라토르]](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다.
 
=== 만년 ===
==== 토목공사와토목 철권통치공사와 철권 통치 ====
[[파일:Serov — Peter the Great.jpg|thumb|left|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착수]]
[[파일: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jpg|thumb|right|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를 고문하고 있는 표트르 대제]]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전쟁북방 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했다. 토목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세이 황태자는 아버지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암살하려다 발각되자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다. 하지만 표트르가 보낸 사신의 거짓말에 속아 귀국하여, 재판을 받고 황태자 직을 박탈당했으며 [[1718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 중에서 죽었다.
 
==== 권력승계 ====
토목 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아버지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암살하려다 발각되자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다. 하지만 표트르가 보낸 사신의 거짓말에 속아 귀국하여, 재판을 받고 황태자직을 박탈당했으며 [[1718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뒷날의 [[러시아의 표트르 2세|표트르 2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표트르는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1세|예카테리나 황후]]의 혈통(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도 문제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그러던 중 [[172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을 [[선박|배]]를 타고 순시하던 표트르는 한 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2월 8일]] 사망했다. 황후 예카테리나가 제위를 계승하여 [[예카테리나 1세]]로 즉위했다.
 
==== 권력승계권력 승계 ====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뒷날의 [[러시아의 표트르 2세|표트르 2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표트르는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1세|예카테리나 황후]]의 혈통(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도 문제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그러던 중 [[172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을 [[선박|배]]를 타고 순시하던 표트르는 한 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2월 8일]] 사망했다. 황후 예카테리나가 제위를 계승하여 [[예카테리나 1세]]로 즉위했다.
 
== 자녀 ==
 
훗날 [[예카테리나 1세]]가 되는 마르타 스캅론스카야와 두번째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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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Каравак - Портрет цесаревны Натальи Петровны.jpg|120px]]
| [[나탈리아나탈리야 페트로브나 여대공 (1718년)|나탈리아나탈리야 페트로브나]]
| {{출생일|1718|8|31}}
| {{사망일과 나이|1725|3|15|1718|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