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니츠 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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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망명 실패(1791년 6월 22일, →[[바렌느바렌 사건]])를 안 직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제국)|레오폴트 2세]](마리 앙트와네트의 친오빠)는 심하게 동요하고 분개하며,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조카들, 즉 [[부르봉 왕가]]를 염려하고 마음아파 했다. 그래서 그는 [[1791년]] [[7월 5일]]에 [[파도바]]에서 안내장을 보내 [[부르봉 왕가]]의 원조를 요청했지만, 이것은 영국은 물론, 부르봉 왕가의 분가였던 [[스페인]] 및 다른 여동생인 마리아 카타리나가 시집가 있는 [[나폴리]], 부르봉 왕가의 옛 동맹 [[사르디니아사르데냐]]도 협력을 거절했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반혁명에는 협조적이었지만 [[뇌졸중]] 환자인 처지였다. 그나마 호소에 응한 것은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3세]]와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로, [[7월 25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군사 동맹을 맺었다.
 
1791년 8월 4일,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과 휴전조약을휴전 조약을 체결하여 뒤를 걱정할 염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코블렌츠에 모인 망명 귀족들은 프랑스에 즉시 침공을 주장했고, [[루이 16세]]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을 파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오폴트 2세는 냉정을 되찾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함을 깨닫고 침공에 소극적이 되었다. 루이 16세가 헌법에 선서하면서 거짓으로 혁명에 협력한다는 내용을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로 읽고, 직접적인 군사행동보다는 그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791년 8월 24일 [[신성 로마 제국]]의 [[레오폴트 2세 (신성 로마 제국)|레오폴트 2세]] 황제와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국왕, [[작센 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 선제후가 모여, 작센의 필니츠 성에서 기자 회견을 했지만, 회담의 주요 내용은 폴란드 분할하는 데 있어 양국이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르투아 백작의 열성적인 설득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인 압박을 선언문 형식으로 내놓기로 동의하고 [[8월 27일]]에 《필니츠 선언》이라는 제목의 짧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프랑스 국왕의 문제는 유럽 전체 군주의 공통 관심사”이며, 프랑스 국왕을 “완전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기 위해 두 군주는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고 결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사적 위협에 불과했고 전쟁 의지나 그 준비는 없었다.
 
그런데 이 선언은 망명 귀족을 매우 기쁘게 했고, 역시 [[루이 16세]]의 또다른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9월 10일]] 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맹렬한 항의 성명을 내고 협박의 강도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