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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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를 옹호했던 [[권시]]가 파직되자, [[윤선거]]의 형이자 [[송시열]]의 사돈인 [[윤문거]]<ref name="leedeok251">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51페이지</ref> 가 사직소를 올렸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교리 [[이익]](李翊) 등이 [[송시열]]을 떠나게 되었고, 재야 사림들도 [[허목]]과 [[윤휴]] 쪽으로 여론이 많이 기울어졌다.<ref name="leedeok252">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도서출판 석필, 2004) 252페이지</ref>
 
여기에 삼조의 노신이요 판중추를 지낸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하고 그의 상소를 태워버린 것은 잘못이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가세했다. [[조경]]의 상소는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다. [[송시열]]과 [[이유태 (1607년)|이유태]], 그리고 부제학 [[유계]] 등은 [[조경]]을 공격했으나, 영상 [[정태화]]와 좌상 [[심지원]](沈之源), 그리고 [[대사간]] [[조수익]](趙壽益) 등은 [[조경]]을 옹호했다.<ref name="leedeok252"/> [[조경]]은 관직을 내놓고 재야에 물러나 있었는데 반대파들은 그를 삭직해서 내쫓자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두 물러나겠다고 강경하게 대응했다.<ref name="leedeok252"/>
 
[[송시열]]은 [[조경]]을 삭탈관직하라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골로 내려가겠다면서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ref name="leedeok252"/>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남인]] 유생들의 윤선도 구명 운동이 계속 일어나 조정에서 끝난 예송 논쟁은 지방 유생들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ref name="park0322"/> 그러자 결국 [[허목]]이 [[송시열]]을 탄핵하는 것으로 사태가 확산된다. 결국 이러한 1차 예송 논쟁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인 석견이 죽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ref name="park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