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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1538년]](중종 33) [[무과]]에 급제하여 [[1544년]](중종 39) [[선전관]]이 되고, 그 해 임금으로부터 군령(軍令)을 엄중하게 지키지 못하고 군정(軍政)이 문란해졌다며 질책을 받았다. 이후 [[춘추관]][[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1546년]](명종 2)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 무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탐화랑(探花郞)을 받고 당상관으로 승진, 이후 [[절충장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28일]]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1548년]](명종 4) [[10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고 춘천부사(春川府使)로 부임했다가, [[1549년]] [[6월]] 체직되었다.<ref>강원도춘천부선생안(江原道春川府先生案)</ref> 다시 전라우수사가 되었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28일]]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1555년]](명종 10) 전라우수사 재직 시 [[전주]]에 있으면서 왜군침입 보고를 받고도 [[달량포]](達梁浦)에 침입한 왜군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재상 [[이준경]](李浚慶)이 그를 거두어 서용하여 다시 관직에 올랐고, [[1557년]](명종 12)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림파]]의 비판을 받고 사퇴, 낙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562년]] [[6월]]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뒤에 [[사헌부]]의 거듭된 반발로 체직당하였다. 이후 [[사림파]]와 갈등하다가 [[1563년]](명종 18)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길주군|길주]][[목사]](吉州牧使)에 이르러 [[1566년]](명종 21) [[12월]] [[사헌부]]로부터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했다'는 이유와 재산을 증식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폭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 생애 후반 ===
[[1567년]](선조 1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 겸 [[오위장]](行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이 되고, 같은 해 행[[의흥위]]부호군 겸 [[오위장]](行義興衛副護軍兼五衛將)이 되었다. [[1568년]] [[비변사]]무당상, 그해 [[6월]] [[첨지사|첨지]][[중추부|중추부사]], [[1571년]](선조 5) 다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 뒤 [[1577년]](선조 1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사퇴하고 고향인 [[평택시|평택]] 도일동으로 낙향하였다. [[1580년]] [[첨지]][[중추부|중추부사]]가 되었다.
 
사망연대는 미상이며 기일은 [[1월 27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군]] [[평택시|평택읍]] 여좌동에 안장되었으며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 차남 : [[원연]](元埏, [[1543년]] ~ [[1597년]], 형 원수량에게 양자로 출계)
***** 손자 : [[원사립]]([[1569년]] ~ [[1610년]], 사남 원전의 양자로 출계)
**** 삼남 : 원용(元墉), 초명은 원훈(元塤)<ref>원연의 사마방목에는 원훈, 원오로 등재되었다.</ref>
**** 사남 : 원전(元塼), 초명은 원오(元墺)
**** 오남 : 원지(元地)
**** 육남 : 원곤(元坤)
**** 칠남 : 원감(元堪)
**** 팔남 : 원해(元垓)
**** 딸 : 원씨
**** 사위 : 성대충(成大忠)
** 장인 : 양희증(梁希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