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함 피랍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phinx222 (토론 | 기여)
15번째 줄: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초기 인식은 냉전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대북인식에 기초하여 푸에블로 호 사건의 배경을 소련과 북한의 공모,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시도 등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베트남 전쟁과같은 글로벌 전략의 일부였기 때문에 푸에블로호 사건도 전략적 수준의 선후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틀 속에서 북미협상에 임했던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나포된 승무원을 송환해야 하는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충돌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의도대로 북미 간 직접협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나포 당시에는 군사적 충돌까지 감수했으며 군사정전위원회 비공개 협상에서 강경한 자세를 고수했다.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은 국가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국내정치적으로 주체사상의 성과를 선전했다. 무엇보다 미국과 협상을 지속하면서 미 국무부의 직접 개입으로 전개된 협상자체가 북한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미국은 협상 주도권을 북한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국의 협상력(negotiation power)이 제한된 이유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서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과 미국 국내에 공개할 수 없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방기 우려, 북한의 강경한 자세 그리고 미국의 연루 우려라는 3중 제약 속에서 전례 없는 기묘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나아가 밴스 특사의 방한 이후 존슨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였다.<ref> 엄정식 (2013). 푸에블로호 사건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접근. 군사, (86), p. 90-92..</ref>
 
== 함께 보기 ==
{{위키공용분류|Pueblo incid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