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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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저술가 겸 사회운동가 [[정경모]]는 장면 총리의 수녀원 피신을 두고 "도망한 지 5일째에 모습을 나타내어 학생들의 선혈로 얻어진 한국 사상 유일한 민주주의 정권을 너무도 간단히 박정희 앞에 내밀어 그것을 이양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며 "피노체트에게 습격당해도 최후까지 저항하여 기관총을 쏘면서 죽어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에 비해 그 말로가 너무도 교활해 한국인으로써 부끄럽다"<ref>정경모, 찢겨진 산하 (기획출판 거름, 1986) 192페이지</ref> 라며 [[국무총리|총리]] [[장면]]의 처신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함석헌]]은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쿠데타를 비판했다.<ref>{{뉴스 인용 |저자=김성수 기자 |제목=함석헌 선생이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다고?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74464 |뉴스=오마이뉴스 |날짜=2011-05-31 |확인날짜=2015-03-31}}</ref>
*혁명 직후, 언론인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를 '민족주의적 군사 혁명'으로 평가, 지지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지지부진했던 [[친일파]]와 기득권 청산 문제에 불만을 가졌고, [[장면]] 정부 역시 이에 미온적 태도를 보였기에 불만이 팽배했다. 더욱이 박정희는
== 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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