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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oxerTroops.jpg|섬네일|260px|right|8개국 연합군 해군과 해군기. (일본의 그림)]]
당시 다구 포대 밖에는 32척의 외국 군함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6월 17일]] 상륙하여 다구 포대를 점령하고 [[톈진]]으로 향하여 [[7월 14일]] [[톈진]]을 함락시켰다. 이때 연합군은 톈진을 몇 구로 나누어 점령하고 다음 날 점령한 [[톈진]] 점령하대한 관리 문제를 토론하였다. 결국, 러시아, 일본, 영국이 지정한 세 사람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행정을 처리하기로 하고, [[7월 22일]]에 열강의 의지를 반영한 식민통치 기구로 '톈진 도통아문'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때는 이미 연합군의 숫자가 11,000명으로 늘어났고, 7월 말에는 34,000명이 되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파일:CaptureTianjin.jpg|섬네일|왼쪽|280px|톈진톈진을 점령한공격하는 연합군.]]
[[톈진]] 함락 이후 연합군은 지휘권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다. 우선 8개국 연합군의 통수권 문제였다. '각국 군의 지휘관 계급의 높고 낮음에 따르자'는 것과 '파견 군대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합리적이지 않았고, 영국은 시모어를 생각했으나 이미 한 번 [[톈진]]에서 패한 경력 때문에 고집할 수 없는 입장이며, 그렇다고 러시아 장군에게 통수권을 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여기에 일본도 러시아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하여 독일은 적극적이었다. 결국, 독일 장군 [[알프레트 폰 발더제]](A. L. Waldersee)가 사령관으로 결정되었다.<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814083011347 1900년 오늘 8개국 연합군, 중국의 베이징을 함락]</ref> 또 하나의 문제는 '어느 때에 [[베이징]]으로 진군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쟁론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미국,일본은 일본군이 많이 상륙하자 러시아를 압도하기 위하여 즉각 출발하기를 주장하였고, 러시아는 이때 만주침략에 목표를 두고 있어(당시 러시아는 '만주에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수십만명의 병력을 파병,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서태후]]에게 호감을 사기 위하여 천천히 진군하기를 희망하였다. 독일도 야심만만하여 국내에서 병력을 동원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므로 적극적으로 천천히 진군하기를 주장하여 그들의 대군이 오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