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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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ege of Peking, Boxer Rebellion.jpg|섬네일|280px|left|[[베이징]] 전투.]]
[[파일:Foreign armies in Beijing during Boxer Rebellion.jpg|right|280px|thumb|[[베이징]]에 입성하는 연합군.]]
[[톈진]]에서 각 국의 지휘관이 모여 [[7월 27일]], [[8월 1일]]과 3일에 걸쳐 ,[[톈진8월 3일]]에서 국의차례에 지휘관이 모여걸쳐 협의하고, 다음날 18300명이 [[베이징]]을 향하여 톈진을 출발하였다.(일-9000명, 러-3500명, 영-2500명, 미-2000명, 프-1000명, 독-200명, 오,이 - 100명) 다음날 이들은 [[송경]], 직례 도독 [[섭사성]], 총병[[마옥곤]]의 청 관군을 패배시키는 격전을 치렀으며, 또 다음날에는 양촌(楊村)을 점령하고, 10일에 마두(馬頭)를, 그리고 마침내 14일엔 베이징를베이징을 점령하게 되고함락했고, 마침내그리고 공사관은 의화단에게 포위당한 지 55일 만에 풀리게 되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 공사관들은 거의 두 달 가까이 버텼는데, 이는 주로 북양대신인 [[영록]]이 [[서태후]]의 '선전포고' 명을 어기기 어려워 공사관을 공격하긴 했지만 겉만 떠들썩했지 실제로는 형식적으로만 공격을 가한것 때문이었다.<ref>《캠브리지 중국사 11권 하: 청 제국 말 1800~1911년 2부: 근대화를 향한 모색》, 존 K. 페어뱅크,류광징 편/김한식,김종건 등역 (2007년 9월 10일). 서울: 새물결, p213</ref> [[베이징]] 공격 당시 8개국 연합군의 피해상황은 일본군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러시아였다. 사상자는 총 합쳐서 437명이었다.<ref name="연합군의 진압">《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신승하 저. 대명출판사. p429~p432</ref>
 
=== 서태후의 피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