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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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 가신 ===
[[파일:YoshiClimber.jpg|thumb섬네일|left왼쪽|[[이나바 산]]을 오르는 히데요시<br />[[쓰키오카 요시토시]]作《月百姿》중 7번째 이나바 산과 달]]
[[덴분]] 23년([[1554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小者)<ref>허드레꾼.적으로 고용되어 주인의 집에 더부살이로 살면서 잡다한 일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주로 평민 출신.</ref> 로서 일한다. 기록에 보면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잔일을 도맡으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선조실록》에는 그가 노부나가에게 고용되기 전에 그의 행차 앞에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부하들이 죽이려는 것을 노부나가가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으니, "도저히 제가 가난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노부나가가 그에게 변소지기 일을 시켰더니, 그가 청소한 변소에서 냄새는커녕 티 하나도 나지 않았고, 노부나가가 자신의 신발을 만들도록 시켰더니 정성을 다해 신발을 만들어 바쳤다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하루는 노부나가가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는데, 히데요시는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해서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어, 우물이 뒤집히면서 물 위에 떠오른 금술잔을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고 이로써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 출세길이 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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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요토미 정권 ===
[[파일:Osaka Castle Keep tower of 「A figure of camp screen of the Osaka summer」.jpg|200px|thumb섬네일|도요토미 가문의 천수<br />〈[[오사카 전투#오사카 여름의 진|오사카 여름의진]]도 병풍〉]]
덴쇼 11년([[1583년]])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 성]]을 축조한다. [[분고 국]] 다이묘 [[오토모 소린]]이 그 화려함에 놀라〈삼국무쌍의 성이다.〉라고 칭했다. 그러나 성의 일부분에 방어상 문제가 있어 히데요시 자신도 그 점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후에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노부시게]]가 방어가 취약한 남쪽에 [[사나다마루]]라고 불리는 성채를 쌓아 방어를 강화해 도쿠가와 측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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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합기》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무쓰노쿠니|무쓰]], [[데와노쿠니|데와]]의 여러 다이묘에게 오다와라 공격에 동참할 것을 명하지만, [[다테 마사무네]]는 뒤늦게 동참한다. 히데요시는 마사무네를 '꿈틀데는 벌레'로 평했고,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대기, 천위, 모든 사람에 미치지 않고 평했고, 격이 다름을 보였다. 마사무네가 보기 좋게 귀향하자, 여러 무장들은 호랑이를 풀어주면 위험하다고 진언했지만, “반항하면 토벌하면 그만”이라고 말했고, 여러 무장들은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오다와라 성은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도 함락하지 못한 견성이였지만, 계절적 이유로 철병해야하는 여타 군과 달리 도요토미군은 히데요시에 의해 군사와 농민을 분리하는 정책인 병농 분리 정책으로 인해서 언제든지 출병과 철병이 가능했고, 당시 호조 가문의 당주였던 호조 우지나오와 당주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던 호조 우지마사의 의견 대립 등으로 인해서 내부의 단결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결국 호조 가문의 오다와라 성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3개월의 농성 후, 개성하였다. [[호조 우지마사]], [[호조 우지테루]](北条氏照)는 할복을 명 받았고, [[호조 우지나오]](北条氏直)는 [[고야 산]](高野山)으로 추방되었다([[오다와라 정벌]]).
 
=== 일본 통일 ===
[[파일:Toyotomi Hideyoshi Kaou.svg|left왼쪽|thumb섬네일|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결]]
최후의 적 고호조 가문을 굴복시켜 일본을 통일했다.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국시대를 마감시겼다. 그러나, [[다테 마사무네]]와 같이 군사력으로 제압하지 않은 다이묘가 많이 있었고, 이들 다이묘의 군사력은 온전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유력 다이묘의 처우문제가 도요토미 정권의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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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6년]]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유럽의 [[범선]]인 [[카락]]과 [[갤리온]] 구입을 시도했었는데 [[포르투갈]]인의 거절로 구입에는 실패했다<ref>이상윤 (2010년 2월 22일) 《기술,배,정치-기술배정치는 세계패권을 어떻게 바꿨는가?》 높은새, 297쪽. {{ISBN|978-89-93989-02-1}}</ref>.대신 당시 일본에 진출한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를 통해 포르투갈 군함의 지원을 요청하고 승낙까지 받았으나 예수회와 관계가 악화되며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며 무산된다.<ref>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 : 일본 선교의 부흥과 쇠퇴의 요인 분석을 통한 적절한 일본 선교 전략의 모색》(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ref>
 
=== 바테렌 추방령 ===
{{참조|바테렌 추방령}}
1586년 5월 [[예수회]]의 일본 선교 총책임자인 코엘료는 오사카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해 대환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규슈정복과 조선에 출병해 중국 대륙을 침공할 계획을 털어 놓았으며, 그 협력도 요청했다.
그리고 만약 조선과 중국 정복에 성공하면 중국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군함 2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무장한 포르투갈선의 채비를 의뢰했지만, 그것 보다도 규슈에는 예수회의 일본 선교의 본거지가 있으며, 거기에는 유력한 로마 가톨릭교도 영주도 있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엘료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큐슈의 로마가톨릭교도 영주들과의 합동 작전을 하는 것은 어떤지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로 선교를 우위에 서서 실시하기 위해 크리스천 영주들을 지원하려고 필리핀으로부터 함대를 파견받도록 1585년에 요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코엘료 뿐만 아니라 당시에 많은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코엘료로서는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고 동조한 히데요시의 계획을 듣게 되어서 히데요시를 기쁘게 하면서 자신도 기뻐 신바람이 나서 그처럼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화가 되었다. 코엘료의 대답을 들은 히데요시는 큐슈의 크리스천 영주들의 군대는 코엘료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때문에 예수회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코엘료는 한척의 후스타선(Fusta 船)을 건조하고 대포를 몇개 구입했다. 그리고 코엘료는 자신이 그것을 타고 일본의 여기저기 각지를 돌아다녔다.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을 위해 하카타에 왔을 때 코엘료는 마치 대제독과 같은 모양으로 이 배를 타고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방문했다. 1587년 6월 규슈평정을 끝마친 히데요시는 하카타 근처에 개선해 와서 같은 달 10일에 코엘료의 배에 탑승해 하카타만 위에서 매우 사이 좋게 담소했다. 히데요시는 그 배에 탑승해서 선내를 상세하게 관찰하고 많이 칭찬하면서도 이것은 틀림없이 군함이다고 말했다. 히데요시가 본 코엘료의 포르투갈 군함은 매우 훌륭한 것이어서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과 기리시탄 영주들을 거느린 예수회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히데요시는 곧바로 5개 항목에 걸치는 바테렌(反天連) 추방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추방령은 예수회가 자숙하고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배편이 없다는 문제도 있고 해서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또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인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동인도 선교 총 책임자로 코엘료 신부를 일본 책임자로 임명한 사람)는 1591 년 3 월 3 일 (덴쇼 19 년 윤 1 월 8 일 ) [[주라쿠 다이]]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히데요시의 추방령을 무효화 시키도록 값비싼 선물을 히데요시에게 뇌물로 주고 추방령을 유야무야 시킨다.
<ref>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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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
[[파일:ToyokuniJinja-Gate-M1745.jpg|thumb섬네일|250px|도요쿠니 신사의 정문]]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보호역을 맡은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후시미 성]]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위암]], [[독살]] 등 여러 설이 있다. 향년 62세. 그날 안으로 히데요시는 [[아미다 산]]에 매장되었다. 히데요시의 묘는 화려하게 조성되었지만, 병력의 사기 문제에 미쳐가는 조선에 출병되어 있는 왜군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장례는 치러지지 않았으며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하였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고 만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 장본인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써 조선에 임진왜란이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전쟁이었음을 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 마저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1615년 도쿠가와 가문의 습격을 받아 어머니 요도도노와 오사카 성에서 자결하는 바람에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끊어지고 말았다.(히데요리에게는 아들 [[도요토미 구니마쓰]]와 딸 나아히메([[덴슈니]])가 있었으나 어린 쿠니마쓰마루는 [[오사카 전투]]이후 [[초소카베 모리치카]]등의 도요토미 가신들과 도주하다 잡혀 [[로쿠조와라]]에서 효수당하였고, 유이히메는 승려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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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작품 ==
=== 드라마 ===
==== 한국 ====
;[[KBS 1TV]]
* 《[[불멸의 이순신]]》 ([[2004년]] ~ [[2005년]], 배우 : [[이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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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여자]]》 ([[2003년]] ~ [[2004년]], 배우:[[정승현]])
 
==== 일본 ====
;[[NHK 대하드라마]]
* 《[[태합기 (1965년 드라마)|태합기]]》([[1965년]], 배우:[[오가타 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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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
==== 한국 ====
* 《이순신》 ([[2008년]], 배우 : [[곽은태]])
* 《이순신》 ([[2010년]], 배우 : [[이승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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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 통제}}
 
[[분류:도요토미 히데요시| ]]
[[분류:1537년 태어남]]
[[분류:1598년 죽음]]
[[분류:도요토미 히데요시| ]]
[[분류:기노시타 씨]]
[[분류:고노에가]]
345번째 줄:
[[분류:히메지성]]
[[분류:일본의 서예가]]
[[분류:오와리 국오와리국 사람]]
[[분류:정유재란 관련자]]
[[분류:삼영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