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군 (조선 왕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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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군|밀성군 침]]이고 어머니는 풍덕군부인 여흥민씨이다. 자는 신옹(愼翁),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처음에 운산정(雲山正)에 제수되었고 12세에 정의대부(正義大夫)를 제수받고, 세조에게 사서(史書)와 경서(經書)를 배웠다. 1468년 10월 운산군(雲山君)에 봉해졌으며 [[1480년]](성종 11) 가덕대부로 승자되고, [[1495년]](연산군 1) 현록대부가 되었다. 1499년(연산군 5) 흥록대부로 강작되고 [[종부시]]제조를 거쳐 종부시 도제조, 영[[문소전]]사(文昭殿), 영[[사옹원]]사(司饔院)를 겸직했다.
 
[[1504년]](연산군 9) 누군가의 모함으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가 거론되었으나 연산군의 옹호로 면죄되었다. [[1506년]](연산군 중종반정에11) 연산군을 실정의 이유로 폐위하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추대하는 [[박원종]], [[성희안]] 등의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분의익운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 2등(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1510년(중종 5) 12월 17일 별세하였다. 중종은 그의 부음소식을 듣고 2일간 철조하였다. 바로 시호를 내려 공소라 하였다. 경순사상왈공, 조덕유노왈소 이다.
 
광주군의 군청 치서쪽 사락리(蛇落里) 대덕(大德) 자좌(子坐)에 매장했다가 뒷날 아버지 [[밀성군 (왕족)|밀성군]] 묘 뒷편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4-1번지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묘비문은 [[남곤]]이 짓고, 신도비문은 관찰사 이언호가 짓고, 글씨는 김희수가 썼다. 뒷날 그의 묘는 [[2003년]] [[11월 21일]] 하남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에 아버지 밀성군을 모신 사당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