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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파일:Groundbreaking ceremony of Gyeongbu Line at Busan, 1901.jpg|섬네일|경부선 기공식남부기공식 ([[1901년]] [[8월9월 21일]])]]
[[파일:Formal Opening Inside Of Gyeongbu Train.png|섬네일|개통식 ([[1905년]] [[5월 25일]])]]
 
[[경인선]]을 부설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철도망을 장악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2대 간선축인 [[서울특별시|서울]] - [[부산광역시|부산]]과 서울 - [[신의주시|신의주]]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898년 9월, 이윽고 부설권을 취득한 일본은 '경부철도'를 설립하고 [[1901년]] 6월 일본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세워, [[8월 21일20일]]에 서울 [[영등포역|영등포]]와 부산 [[부산역|초량]]에서 각각 착공식을 거행했다. 일본은 [[영국]]에서 자금을 빌려와 [[미국]]이 가졌던 부설권과 건설 장비를 구입하였다<ref>[http://digitallibrary.usc.edu/search/controller/view/kda-m98.html Railroad train in Korea] USC Digital Library</ref>.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자본금의 4분의 1은 일본 국고에서 나왔으며, 불입금의 10배에 달하는 사채모집도 승인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사장은 "경부선은 조선에서 일본의 유일 맥관이자 사활의 기관"이라고 황족, 부호에서 시골 농부까지 주식을 사서 애국하라고 선동하였으며, 이 국민주 모금운동으로 2,500만 원의 거대 자본금을 조달하였다.<ref>노형석, 《한국 근대사의 풍경》, 생각의 나무, 2004, p20</ref>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물자 수송등의 이유로 급격히 공사가 진행, [[1904년]] [[12월 27일]]에 완공되어 [[1905년]]에 전선이 개통되었다. 일본은 영국처럼 차량이 좌측으로 다녔기 때문에 경부선의 열차도 좌측통행을 하게 되었다. [[1906년]] 러일전쟁 후, 일본의 수상 [[사이온지 긴모치|사이온지]]는 경부철도 매수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경부선과 경의선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 소관으로 국유화하였다.
 
철도 예전선 주위에 사는 조선인들은 토지 징발과 인력 동원, 물자조달 등을 좌우한 일본군의 영향 아래 있었으며, 노반공사에 농번기 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동원되었으며, 식량과 가축에 대한 강제 징발도 수시로 자행되어 유랑민이 속출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은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 있는 사람이 없으며, 열 집에 아홉 집은 텅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고 보도했다. 시흥과 파주, 곡산과 평산 그리고 평양에서 조선인들은 이에 항의하는 싸움을 벌였고, 선로상에 큰 돌을 놓아 저항하였다. 이런 사건의 주모자는 잡히는 대로 사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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