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리치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2번째 줄:
|이름 = 조소카베 모리치카
|원어이름 = 長宗我部 盛親
|그림 = File:Chōsokabe Morichika.jpg
|그림크기 = 200px
|그림 크기 = 100px
|그림설명 = 교토 렌코지(蓮光寺) 소장 조소카베 모토치카 상(像)
|가몬 = Nanatsu Katabami inverted.png
33번째 줄:
}}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는 [[아즈치 모모야마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부터부터 [[에도 시대]] 전기까지의초기까지의 [[도사 국|도사도사국]] [[다이묘]]·[[무장]]이다. [[조소카베 씨조소카베씨]] 제22대 당주(센고쿠 다이묘로서는 최후의 당주).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4남.
 
아버지 모토치카의 사후에 조소카베 가의 [[가독]]을 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속하지만, 패색이 짙어 싸우지 않고 도사로 귀국하였으며 [[도쿠가와 씨도쿠가와씨]]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형 [[쓰노 지카타다]]를 죽인 것을 이유로 검문받고 영지를 몰수당해 [[낭인 (일본사)|낭인]]이 되었다. 10여년 후 도요토미 측에 서서 [[고향]]인 도사 1국의 증여를 조건으로 옛 가신들과 함께 [[오사카 성]]에 입성하였다. [[오사카 전투]]이 발발하면서 분투를 펼치지만 패전하였다. 도망쳐 재기를 도모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조소카베 집안은 몰락했다.
 
== 삶 ==
41번째 줄:
[[덴쇼]](天正) 3년([[1575년]])에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지쿠마마루(千熊丸).
 
덴쇼 14년(1586년) [[헤쓰기가와(戸次川) 전투에서전투]]에서 맏형 [[조소카베 노부치카|노부치카]](信親)가 죽고 또 다른 형 [[가가와 치카카즈지카카즈]](香川親和)나 [[쓰노 치카타다지카타다]](津野親忠)를 추대하려는 세력과 가독 상속을 놓고 경쟁하였으나 최종적으로 아버지 모토치카의 지명을 받아 덴쇼 16년([[1588년]])에 세자(世子)로 지명되었다. 여기에는 [[기라 치카자네지카자네]](吉良親実)를 비롯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원래 모리치카는 형제 가운데서도 가장 오만하고 경솔한 성격이었기에 인망은 고사하고 혐오감을 품은 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모토치카는 그런 혐오감을 드러내는 자들을 모두 처단해 버렸다). 그럼에도 모토치카가 어린 지쿠마마루를 세자로 지명한 이유로는 치카카즈와 치카타다가 다른 가계를 이미 잇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모토치카 자신이 누구보다도 아꼈던 아들인 노부치카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기에는 이들 두 사람이 나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토치카에 의해서 조소카베 가문의 후계자로 결정된 지쿠마마루는 [[도요토미 씨도요토미씨]](豊臣氏) 일문이 아닌 마스다[[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로 원복(元服)을 행하고 그의 이름자 한 글자 「모리」(盛)를 따서 모리치카(盛親)라 하였고, 도요토미 정권 아래서 조소카베 집안의 격은 더욱 낮아졌다.
 
조소카베 집안의 가독이 결정된 뒤 아버지 모토치카와 함께 조소카베 집안을 공동지배하게 되었다. 부자의 이원지배 아래 조소카베 씨는 도요토미 씨에 의한 덴쇼 18년([[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덴쇼 20년([[1592년]])부터 7년 동안 벌어진 조선 침공에도 참가했다. 또한 [[분로쿠]](文禄) 3년([[1594년]]) 이후 지행완행권(知行宛行権)이 모리치카에게 이양되었으나 이 밖의 다이묘 당주로써의 권한은 변함없이 아버지와 공유하였다. 또한 게이초(慶長) 2년(1597년) 3월 24일에 아버지 모토치카와 함께 제정한 「조소카베 모토치카 백개 조」를 발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