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리치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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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닌이 된 모리치카는 게이초 6년에 오사카에서 후시미로 이주해서 다이묘로 복귀하기 위한 운동을 게이초 10년까지 이어나갔다. 게이초 15년에는 삭발하고 大岩祐夢라 칭하고 옛 신하들의 돈으로 살았다고 하며, [[데라코야]]의 스승을 하며 살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1차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게이초 17년경에는 교토의 가미타치우리(上立売)에 있는 야나기가즈시(柳ヶ逗子)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기요하라 히데카타]](清原秀賢)와 교우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어찌 되었든 반도쿠가와파 위험인물로써 지목된 모리치카는 [[교토소사대]] [[이타쿠라 가쓰시게 (1545년)|이타쿠라 가쓰시게]]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 오사카 전투 ===
오사카측과 도요토미측간의 사이가 악화되는 가운데 게이초 19년(1614년) 9월에 가타쿠라 가쓰시게는 모리치카에게 오사카 입성 시비를 힐문했고 모리치카는 이번에는 간토측에 가담해 전공을 세우고 미미하게나마 녹을 받고 싶다는 염원을 비쳤고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와도 맺어둔 약속이 있다며 가쓰시게를 안심시켰고 여섯 명의 종자와 함께 교토를 빠져나와 10월 6일 오사카 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했다. 이에 응해 조소카베 집안의 재흥을 꿈꾸는 나카노우치 소우에몬(中内総右衛門)을 비롯한 옛 가신들도 하나하나 오사카 성으로 들어 왔고 오사카 성에 결집한 牢人衆 가운데에는 가장 많은 수치인 천 명을 거느리게 된 모리치카는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모리 가쓰나가(毛利勝永)、아카시 다케노리(明石全登) 등과 함께 이른바 「5인중」(五人衆)이라는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렇게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고 농성전이 된 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기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고토 모토쓰구 등과 함께 하치조메구치(八丁目口) ・ 다니마치구치(谷町口)에 포진하고 사나다 노부시게가 쌓은 사나다마루(真田丸)의 지원 거점를 맡았다. 12월 4일에 사나다마루 전투가 시작되고 성안의 화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난조 모토타다(南条元忠)는 이를 배반의 신호로 착각하고 몰려왔다가 이이 나오카타(井伊直孝)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松平忠直) 부대에 응전해 손해를 입히고 퇴각시켰다. 그러나 그밖에는 대규모의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놓인 채 오사카 측과 에도 막부 사이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야전이었던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공격하고자 5천여 주력 군세를 거느리고 출진했고, 도쿠가와측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부대와 격돌하였다(하치오八尾 ・ 와카에若江 전투).
 
게이초 20년(1615년) 5월 6일 새벽 하치오(八尾)로 진출해 있던 조소카베 부대의 선봉 ・ 깃타 시게치카(吉田重親)가 도도 다카토라 군세와 조우한다. 이때 조소카베 부대의 선봉은 경무장만을 갖추고 있었기에 곧장 본대로 합류하고자 했지만 거꾸로 도도 부대에 발각되었다. 철포를 쏘아대는 적 앞에서 조소카베 부대 선봉은 괴멸되었고 깃타 시게치카는 본대에 전령을 띄운 뒤 전사했다. 도도 다카토라 부대는 기세를 몰아 조소카베 본대를 섬멸하고자 공세를 강화하였고, 모리치카는 강둑에 병사를 숨겨두고 도도 부대를 충분히 끌어들인 뒤 창을 겨눈 병사를 돌격시켰다. 뜻하지 않은 맹공격을 당한 도도 부대 선봉은 일시에 괴멸되었고,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조소카베 부대의 공세 앞에 도도 부대는 순식간에 전군이 혼란에 빠졌으며 다카토라의 조카인 도도 다카카타(藤堂高刑) 등 전선의 무장들이 한꺼번에 전사하고 말았다. 통제가 어지러워진 도도 부대는 다카토라 자신도 도망쳐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궤주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모리치카 부대와 나란히 와카에로 진군해 있던 오사카측 별동대의 기무라 시게나리가 이이 나오타카 등의 군세와 전투를 벌이다 패해 무너지고, 이이 부대가 도도 부대를 구원하러 오면서 이 소식을 들은 모리치카는 적중에서 고립되는 사태를 피하지 못한 채 오사카 성으로 퇴각했다. 모리치카 부대는 이때의 하치오 전투에서 퇴각한 시점에서 큰 피해를 입고 실질적으로 괴멸 상태에 빠졌다고 여겨진다. 사실 다음날 덴노지(天王寺) ・ 오카야마(岡山) 전투에서 모리치카는 오사카 성에 남아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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