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리치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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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 전투 ===
오사카측과 도요토미측간의 사이가 악화되는 가운데 게이초 19년([[1614년]]) 9월에 가타쿠라 가쓰시게는 모리치카에게 오사카 입성 시비를 힐문했고 모리치카는 이번에는 간토측에 가담해 전공을 세우고 미미하게나마 녹을 받고 싶다는 염원을 비쳤고 [[아사노 나가아키라]]와도 맺어둔 약속이 있다며 가쓰시게를 안심시켰고 여섯 명의 종자와 함께 교토를 빠져나와 10월 6일 오사카 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했다. 이에 응해 조소카베 집안의 재흥을 꿈꾸는 나카노우치 소우에몬(中内総右衛門)을 비롯한 옛 가신들도 하나하나 오사카 성으로 들어 왔고 오사카 성에 결집한 낭인무리(牢人衆) 가운데에는 가장 많은 수치인 천 명을 거느리게 된 모리치카는 [[사나다 노부시게]], [[고토 모토쓰구]], [[모리 가쓰나가]], [[아카시 다케노리]](明石全登) 등과 함께 이른바 「5인중」(五人衆)이라는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렇게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고 농성전이 된 [[오사카 겨울 전투|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기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고토 모토쓰구 등과 함께 하치조메구치(八丁目口) ・ 다니마치구치(谷町口)에 포진하고 사나다 노부시게가 쌓은 [[사나다마루]]의 지원 거점를 맡았다. 12월 4일에 [[사나다마루 전투]](真田丸の戦い)가 시작되고 성안의 화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난조 모토타다]](南条元忠)는 이를 배반의 신호로 착각하고 몰려왔다가 [[이이 나오타카]]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1595년)|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에 응전해 손해를 입히고 퇴각시켰다. 그러나 그밖에는 대규모의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놓인 채 오사카 측과 에도 막부 사이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파일:ChOsokabe Morichika Banner; Natsuka Masaie (1562?-1600) Banner.jpg|200px|섬네일|오른쪽|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오사카 전투에서 사용한 깃발 그림. ]]
야전이었던 [[오사카 여름 전투|여름 전투]]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공격하고자 5천여 주력 군세를 거느리고 출진했고, 도쿠가와측의 [[도도 다카토라]] 부대와 격돌하였다([[야오·와카에 전투]], 八尾・若江の戦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