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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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 교사 재직 중 같은 아산 출신의 [[기독교]] 목사인 이규갑과 결혼하였는데, 부부가 모두 독립운동을 하였기에 수차례 연행되어 고초를 치를 수 밖에 없었다. [[3·1 운동]]의 후속 움직임으로 [[인천]]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할 무렵, [[서울 서대문구]]의 아현동 고개에서 이애라가 아기를 업고 가던 중 일본 경찰과 마주쳤을 때 일경이 이 아기를 집어던져 절명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평양]]의 [[정의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남편과 함께 이 운동에 참여했다가 구금되었다. 이 무렵 이규갑은 전국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 지지를 표명한 인천의 국민대회에 참가하고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했으며, 이애라는 [[한남수]], [[김사국]], [[홍면희]] 등과 함께 적극 가담했다. 이규갑은 곧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였다.
 
국내에 남은 이애라는 [[1920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여성들의 모임인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지방의 교회를 순회하며 모금 운동을 했다. 당시 국내 각 지역 및 해외에까지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고, 이애라는 애국부인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면서 상하이와 연락을 취했다.